2015.10.22. Day 34
36 왜 산티아고 인가?
2015.10.22. Day 34
새벽 2시 오늘도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사타구니가 축축한 느낌이 들어 급히 손을 넣었다. 아니다. 다행이다. 여기까지 와서 몽정을 하는 건 순례에 대한 예의가 아니긴 하지. ㅎㅎ
신기한 게 힘든 순례길 도보를 마치고 배낭을 벗어 놓으면 다리를 절뚝거리고 계단도 잘 못 내려간다. 나뿐만이 아니다. 다들 비슷한 거 같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 배낭만 메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들 너무 잘 걷는다. 옆에 있는 친구는 다 이게 '배낭 증후군' 이란다. 배낭을 메야만 삶의 무게가 느껴져 아프지 않는다는. ㅎㅎ
모처럼 맘껏 빨래를 했다. 오후 4시 아직 햇살은 뜨겁다. 빨래를 그 따가운 햇살 아래 너는 짜릿함이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계속 빨래를 실내 침대 부근에 걸쳐서 널고 덜 마른 상태로 배낭에 넣고 다녀 그런가 옷에서 냄새가 많이 났었다. 눅눅하기도 했고. 그런데 드디어 바짝 말릴 수 있게 된 거다. 거기에 바람까지 살짝 불어준다. 이런 것에 행복을 느낀다.
언덕 아래에서 또 문어숙회를 먹었다. 여기도 넘 맛나다. 맛난 안주가 있으니 술은 또 따라온다. 같이 있는 분이 와인 한 병을 시킨다. 이 친구도 싸리아에서 걸오온 모양이다. 첫날 비 와서 넘 고생했다는 얘길 하며 웃고 떠드는데 와인은 순식간에 다 비워진다. 막판 한병 더 시킬까 하다 내일을 위해 참았다.
오늘도 걷는다. 아침 8시. 하늘의 별이 넘 아름답다. 조금 걸으니 저 산 너머에서 여명이 밝아온다. 해뜨기 작전의 은은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걸으며 수시로 뒤돌아본다.
아침 8시부터 2시간 정도의 도보는 그리 힘들지 않다. 기운도 있고 아침이라는 상쾌함도 있기 때문이다. 딱 처음 힘들어질 때쯤엔 어김없이 카페가 나타난다. 기가 막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참치 샌드위치랑 크림빵에 막 짜낸 오렌지주스를 시켰다. 오늘의 브런치다.
SKT 김정수 실장님이 '순례자의 길은 왜 걷고 계세요?'라고 문자를 보내오셨다. 글쎄. 나도 왜 걷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처음엔 걷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여기 와서 걷다 보니 그 이유를 잊어버렸다.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과 열심히 걷는 사람들 틈에서 말이다. 그래서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보냈다. 그랬더니 자기도 은퇴하면 꼭 걷고 싶은 길이란다. 그런 곳이다.
오늘은 울창한 유칼립투스 숲을 몇 번 지난다. 올곧게 하늘로 치솟은 그 나무 숲길을 걸으면 정신도 바로 서는 듯하다. 연신 순례자들은 '부엔 까미노, Buen Camino'를 외치며 인사한다. 여기 말로 '즐거운 순례길 되세요' 정도 된다. 나도 열심히 부엔 까미노를 외쳤다.
산티아고가 30킬로 남았다는 안내 표지석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다시 그 오른쪽 발가락 물집이 아려오기 시작한다. 왼쪽 발바닥 전체도 쑤시고. 한재선 박사의 저주가 다시 시작된 건가? 넘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순례길에서 가장 고비였던 거 같다. 낮은 돌담이 있어 그곳에서 쉬다 가기로 했다. 돌담이 널찍해서 그 위에 누었다. 다리를 뻗으니 넘 편하다. 잠이 살짝 온다. 다시 일어난다. 또 걸어야 된다. '왜 걷냐고?' 빨리 도착해서 숙소 구하고 쉬려고 걷는다.
고생은 사서 하는 거라 했다. 편히 있으려면 그냥 집에 있으면 된다. 괜히 비싼 비행기표 들여 여기 산티아고까지 와서 걸을 필요가 없다. 걷는 것만 목적이라면 우리나라도 이쁜 길이 얼마나 많이 있나? 그럼 왜 산티아고인가?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야고보로 나온다. 예수 사후 야고보는 스페인으로 선교를 떠난다. 선교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장례소식을 듣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야고보는 바로 헤롯왕에게 잡혀 교수형 처해진다. 어떻게 보면 허무한 인생이다. 야고보의 제자들은 야고보의 시신을 거둬 그의 뜻을 기려 스페인에 매장한다. 그 유해가 거의 8, 9백 년이 흘러 산티아고 인근에서 발견된다. 그 당시 이베라아반도(스페인)는 이슬람이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야고보 유해 발견 소식은 스페인 카톨릭 신자들을 움직여서 결국 스페인에서 이슬람을 몰아내고 야고보가 지키고자 해던 종교를 수호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로마 교황청은 산티아고를 예루살렘, 바티칸에 이어 3대 순례성지로 명한다. 유해가 발견된 이곳은 산티아고로 칭해지며 그 후 산티아고는 유럽을 구한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고 천 년 전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그 유해를 보러 산티아고를 찾게 된 것이다. 뭐 이게 나랑은 크게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조금 상관이 있기도 한 거 같고.
이제 다음 주면 돌아간다. 가서 할 일이 제법 있을 것이다. 두려움도 든다. 그런데 그런 걱정이 하나도 없다. 이게 산티아고 순례길의 힘인가?
수시로 문자나 이메일이 들어온다. 대부분은 무시한다. 하루 전화통화는 한번 정도만 한다. 딸내미들이 가끔 아빠 보고 싶다고 아이패드로 페이스타임 걸어온다. 오늘은 미술학원에서 만든 왕관을 보여주며 누구 거가 더 이쁘냐고 물어본다.
인천공항에서 산티아고로 떠나기 10분 전 미국 본사 대표 Ted에게 사임의사를 표현했다. 사라 브라이먼트의 노래 가사로 시작하는 제목으로 이메일을 보내고 바로 아이폰을 비행기모드로 바꿔 두었다. 먼저 떠나서 미안하단 표현은 하기 싫었다. 분명 놀라긴 했을 것이다.
Time to say good bye, IDG!
Dear Ted,
It’s time to say ‘Good Bye’.
It’s been almost 8 more years at IDG Ventures Korea, and I made a decision of leaving the company for my future. Now, I’m heading for Santiago in Spain and will walk ‘Camino de Santiago’ for 10 days.
Perhaps, I am going to visit Boston after coming back and want to talk about the follow-up process of the Fund. Let’s have a meeting next month.
I had good times with IDG Ventures Korea. Also, I cannot forget warm and continuos supports from Mr. McGovern and You. I really appreciate it.
See you soon.
Best regards,
Matthew
이제 아르카도피노까지 12킬로 남았다. 참아야 한다. 이를 악문다. 햇살도 뜨겁다. 목적지까지 4킬로다. 마지막 힘을 내본다. '마션' 욕을 하면서 말이다. 높은 언덕에 마을이 보인다. 순례길에서 약간 벗어나 언덕을 올라가야 알베르게가 있다. 뙤약볕을 맞으며 아스팔트 언덕을 올라간다. 처. 벅. 처. 벅. 드뎌 숙소 도착이다.
10월의 햇살은 참으로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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