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내가 널 택하고 세웠다

2015.10.23. Day 35

by 메추리

37 내가 널 택하고 세웠다

2015.10.23. Day 36

그 친구와의 마지막 저녁은 문어숙회와 와인으로 해결했다. 역시나 맛은 끝내준다. 그리고 아침 7시. 넘 여유를 부렸나 보다. 8시 지나니 모든 사람들이 출발했다. 20킬로.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이다. 그 친구와 난 8:35분쯤 출발했다. 우리 밖에 없다. 8:30분이면 모든 불이 꺼진다. 나갈 수밖에 없다.

그 친구와 이별할 순간이다. 1시간 정도 걸으니 카페가 있다. 그 친구가 아침을 사겠단다. 카푸치노와 애플파이. 다 먹으니 자긴 이제 혼자 다니고 싶단다. 건강하라고 말하며 헤어졌다. 내가 먼저 말하려 했는데 이 친구가 선수 친 거다. ㅎㅎ

애초에 혼자 떠났으니 여행의 마지막도 혼자 맞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고. 이 친구가 먼저 용기를 낸 거고. 그 용기에 박수를. 그 친구를 보내고 와인을 한잔 시켰다. 어차피 오늘은 산티아고 5킬로 남기고 고소산 꼭대기에서 잔다. 15킬로 정도만 가볍게 걸으면 된다. 벌써 1/3은 왔다. 여유가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된 나무가 터널처럼 우거진 언덕길이다. 갑자기 한 CCM이 생각난다. 지난 9월 13일 우리 성가대에서 불렀던 노래다. 사실 나와 와이프는 교회 성가대에서 만났다. 와이프는 성악을 전공한 소프라노 솔리스트이고 난 겨우 고음 나올까 말까 하는 테너 파트다. 어쩌면 한 달 전 부른 이 노래가 나의 산티아고 행을 불 지른 거나 다름없는지도.

나 죄악의 어두운 밤 홀로 헤매일 때
밝은 빛 한 줄기 날 꺼내 주었네
나 그 빛 스스로 찾았다 생각했지만
내가 널 택하고 세웠노라 주 말씀 하시네
(주를 향해 걸어가리, 우효원 곡 중)

이 노래를 부르며 언덕을 오르는데 눈물이 왜 그리 나던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고 여기까지 올라선 것도 내가 열심히 해서 그 빛 잘 찾아온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택해주시고 세워주신 분이 있었던 거였다. 그러니 내가 뽐내고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 베풀어야 한다. 그분이 나에게 베푼 것처럼. 그리고 이 노래 뒷 가사처럼 이젠 '빛 가운데로 걸어가야 한다'.

며칠 전 만난 캘리포니아 아줌마가 생각난다. 내 앞에서 열심히 걸어가다 터널이 나오니 그 중간쯤에 멈춰 서더니 눈 감고 노래를 부르는 거다. 얼굴에선 평화가 넘쳐나고 노래 곡조도 아름답고. 나도 그렇게 노래 부르려 했는데 테너 파트만 연습해서 인지 내 목소리를 내가 듣는데 이건 아니다 싶다. 눈물이 나오다 다시 멎는다. 쩝!

그냥 언덕 올라가자. 좀 더 걸으니 다시 카페가 나온다. 하몽과 나폴리식 스파게티 그리고 와인 한잔을 시켰다. 좀 먹고 있으니 일본 청년 하나가 들어온다. 됴쿄에서 왔단다. 왜 왔냐고 물으니 답은 'Interesting!' 그래 그게 다지. 그러면서 나 보고 왜 혼자 다니냐 묻는다. 다른 한국사람들은 다 그룹으로 다닌다고 하면서. 내 대답은 'I love walking alone'.

오늘은 알베르게를 구하려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산티아고 5킬로 정도 남기고 고소산 아래에서 잘 거거든. 거기에 숙소 하나 미리 정해둔 것 만으로 오늘 순례길은 한층 여유가 넘친다. 하늘도 한번 더 보고 좀 더 자주 뒤돌아 보고 작은 사물도 자세히 보려 하고. 이런 게 진정 여유로운 순례 여행 일텐데 왜 순례 여행까지 와서도 알베르게 만을 보고 걸었을까? 여유로운 순례 여행하려고 코스도 짧게 하고 시간 여유도 있게 잡은 거였더니만 그저 옆에 걷는 순례자들 의식하며 경쟁적으로 걸었던 거 같다. 뒤늦지만 산티아고를 앞둔 마지막 날 이런 여유를 찾아서 다행이다. 우리 인생도 목적지를 일찍 정해두고 여유롭게 즐기며 가야 할 터인데. 과연 그런가?

조금 걸어오니 격자무늬 철망들로 이루어진 벽이 보인다. 다들 나뭇가지를 주워 십자가를 만들어 그 철망에 끼워두는 거다. 각양각색의 십자가로 이뤄진 그 철망이 장관이다. 나도 하나 만들어야 했다. 나무를 찾는데 저쪽에 가시가 촘촘히 박힌 나무가 보인다. 기왕이면 가시면류관 느낌의 가시 십자가가 좋을 것 같았다. 오른손 검지가 찔렸다. 피가 난다. 그래도 완성은 되었다. 좀 더 크로스 부분을 단단히 묶기 위해 전날 산 조개목걸이를 이용해서 매듭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철망에 끼워두었다. 뿌듯하다.

도시가 가까워지면서 도로 밑으로 터널식 인도를 만든 게 여럿 있다.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 터널에는 다양한 그림과 낙서들이 있어 순례자들을 즐겁게 해 준다. 그중 황찬양님이 2014년 11월 22일에 쓴 시를 하나 옮겨 본다. 나보다 한 달 뒤면 많이 추웠을 텐데.



간절히 (황찬양 작)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
당신이 어디서 왔고
어떤 이유로 이 길을 걷는지
어떤 일로 기뻐하고 눈물짓는지
어떠한 삶의 아픔이 있는지
나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든
못 읽고 지나치는 사람이든
언어가 달라 읽지 못하는 사람이든
난 지금 당신이 행복하다라고 말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지루한 언덕길 그것도 도로 옆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간다. 산마르코스 마을이 나타난다. 이제 5킬로만 더 가면 산티아고이다. 난 오늘 여기서 멈춘다. 물론 지금 걸어도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 아껴두고 싶다.

나랑 함께 걸었던 이들은 다 오늘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그리고 순례자들을 위한 성금요일 저녁 미사를 드릴 것이다. 함께 하지 못해 아쉽기도 하지만 그들의 행복과 무사귀환을 기도한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산티아고(야고보)를 만날 수 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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