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8. Day 30
32 지도가 멈추는 그곳이 순례의 시작이다
2015.10.18. Day 30
눈이 떠졌다. 새벽 3:45분. 시차적응이 안된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쉽게 잠에 빠져들 수 없다. 그래서 책을 하나 꺼냈다. '마션'
괴짜 과학자의 너무나 사실 같은 화성 생존기다. 발상도 기발한데 글발은 더 죽인다. 거기에 치밀한 과학적인 디테일까지 살아있다. 딱 내 스타일이다. 거기에 푹 빠져 화성 생존 20일째 까지 읽은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잠에 들었다. 무겁지만 잘 가져온 것 같다.
좁은 욕조에 들어가 몸을 구부리며 겨우 샤워를 마쳤다. 이 호스텔은 위치는 좋은 데 그 외에 아무것도 만족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 호스텔 도착 후에도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낸 것이고. 비록 불토였지만 말이다. 딱 방안에 들어가 콕 박혀 있다가 오전 9시 무렵 탈출했다.
마드리드 관광 1순위인 솔 광장으로 향했다. 일찍이 유럽의 광장 사이즈는 알고 있었지만 여기도 생각보다 작았다. 어느 말 탄 장군의 동상이 있고 그 옆쪽에 곰이 나무 열매를 따 먹는 동상이 있다. 예전엔 큰 곰이 이 부근에 많이 있었는데 그 곰들이 마드리뇨 열매를 좋아했다는 것에서 마드리드의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어 세워둔 것 같다. 국가의 신화에는 동물들이 잘 등장하는데 우리나라는 곰이 마늘을, 스페인에선 마드리뇨를 먹었나 보다.
배가 좀 고파온다. 마침 문을 연 카페가 있어 들어갔다. 카푸치노와 하몽을 넣은 샌드위치를 시켰다. 양은 조금 적었지만 맛났다. 그 양 적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조금 걸어 내려오니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빵집이 있었다. 거기서 크림빵과 하몽 샌드위치를 또 샀다. 광장 구석에 앉아 먹는데 맛 하나는 기똥차다. 꽃할배에서 본 그 집 같기도 하다.
구글맵을 켜고 마요르 광장을 찍었다. 바로 근처다. 시각은 10시 반이다. 12시 10분까지 기차역에 가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마요르 광장 도착해서 인증샷 날리고 다음 장소인 마드리드 왕궁으로 걸어 내려오다가 산미구엘 시장을 봤다. 사진만 찍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백색에 가까운 거대한 왕궁이 보인다.
왕궁까지 내려오는 길은 구시가지 좁은 구건물 사이로 난 골목길을 내려오는 것이다. 그 길이 좁고 구부정하지만 나름 운치도 있고 아름다웠다. 가끔 찌린내가 나는 것만 빼고 말이다.
왕궁은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그 웅장함은 대항해시대를 호령했던 패기를 엿보이게 한다. 그런데 정작 내 관심을 더 끈 것은 왕궁 앞 악사의 오페라 소리였다. 한참을 이태리 가곡과 함께 왕궁을 둘러보니 이 또한 운치 있었다.
아차 내가 지금 이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빨리 산티아고 순례길 출발지인 싸리아(Sarria)로 가는 차르마틴 기차역으로 가야 한다. 택시를 탔다. 택시는 내가 한참을 내려왔던 구시가지를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아뿔싸, 내가 동선을 잘못 짰구나.
차는 그리 막히지 않게 잘 도착했다. 탑승 플랫폼을 확인하고 현금이 부족할 거 같아 110 유로를 더 찾았다.
Renfe 기차 해당 칸을 물어물어 그 차량에 탑승했다. 두 명씩 마주 보고 앉는 테이블 석인데 나만 빼고 다 이쁜 여성분들이다.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내 앞 여성분이 앞으로 숙일 때마다 살짝 보이는 가슴골은 나의 피곤을 다 가시게 한다. 뭐 좋은 게 좋은거쥐. 하하.
기차는 마드리드를 벗어나 벌판을 달린다. 소설 '마션'을 다시 꺼내 들었다. 주인공은 화성에서 생존에 필요한 물을 만드는데 여념이 없다. 난 생존에 필요한 뭔가 만들게 없어서 오히려 고민이다. 아차. 이번 순례 여행은 그동안 IDG에서의 인생을 매듭 짓고 미래를 구상하기 위한 머리 비우는 작업이었지?
오후 2시, 배가 고파온다. 바로 앞이 식당칸이다. 샌드위치와 맥주를 주문했다. 물론 스페인 맥주로. 창가 쪽으로 스탠딩 빠로 꾸며놓았다. 아이폰 음악을 틀었다. 캐로 에머랄드(Caro Emerald)의 'Liquid Lunch'가 흘러나온다. 맥주와 함께 먹으니 이게 바로 알코올 점심이다. 노래에 충실하기 위해 맥주캔 두 개를 더 시켰다. 역시 난 이런 걸 잘 지켜. ㅎㅎ
약간 핑 돈다. 캐로 에머랄드의 음악이 끝나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었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슬픈 선율이 나오니 눈물이 흐른다. 나이 드니 눈물샘 조이는 근육이 약해졌나 보다. 제길.
다시 자리로 돌아와 한 숨 잤다. 목이 말라 깨서 다시 식당칸으로 갔더니 주인이 알아서 맥주를 준다. 'No No, Water Please' 하니 웃으며 물을 준다. 여기서도 술꾼으로 낙인찍힌 건가? 그. 런. 건. 가.
6시간 25분 만에 싸리아에 도착했다. 비교적 작은 마을이다. 구글맵을 켜고 숙소 알베르게를 찍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걸어가다 보니 산티아고 순례길 상징인 조개껍질이 보인다. 이제 본격 순례길로 접어든 것이다. 15분을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근데 아무도 없다. 멍하니 있으니 키 큰 놈이 하나 말을 걸어온다. 여기선 주인이 자리 비우는 게 흔한 일이란다. 그러니 무작정 기다리란다. 자기도 지금 기다리는 중이라고. 이 친구는 한주 전 레온(Leon)부터 걸어온 순례자다. 왼쪽 다리를 조금 절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힘들다면서.
주인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여권을 내밀고 9유로를 냈다. 6인승과 8인승 숙소 중에 선택하라 해서 8인승을 택했다. 그게 여기 순례자들과 좀 더 친해질 수 있을 거 같아서.
이놈의 배꼽시계는 어김없이 울린다. 슬리퍼로 갈아 신고 나왔다. 옆 쪽에 있는 이태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오늘의 전채요리와 알리오 올리오를 시켰다. 화이트 와인과 함께. 전채요리는 하몽과 치즈가 계란물 듬뿍 먹은 식빵 사이에 잘 숨어있는 맛난 놈인 반면, 알리오 올리오는 마늘을 너무 아껴 흔적을 찾기 힘든 아주 볼품없는 놈이었다. 메인 요리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레드와인을 더 시킨 건 물론 아니지만 말이다. 총 11유로(14,000원 정도). 시골이라 싸다.
오늘 점심에 이은 술로 기분이 좋아졌다. 나오니 비가 조금 뿌려진다. 2층 침대 4개가 자리 잡은 숙소로 돌아왔다. 아까 그 친구가 있다. 이름을 물으니 쉬운 이름은 'Oh Leg' 라며 자기 아픈 다리를 보여준다. ㅋㅋ 귀여운 녀석. 러시아에서 왔단다. 난 '매튜'라 부르라 했다. 잘 때 춥냐고 물으니 자긴 창가 쪽에서 창문 열어두고 잔단다. 참, 러시아 애였지. ㅋㅋ
샤워를 했다. 공동 샤워장인데 마드리드의 호스텔 보다 훨 좋았다. 옷도 갈아입고 이틀 치 빨래 거리를 들고 세탁실로 향했다. 세탁기 돌리는데 3유로(4천원). 아깝다. 와인 한잔이 0.5유로(700원 조금 안됨)인 거에 비하면 너무 비싸다. 이돈 아껴서 와인 사 먹는 게 더 경제적이다. 참고로 난 경제과 출신이다. ㅎㅎ 그리고, 옆에서 손빨래했다. 바로 탈수기로 마구 돌렸다. 그리고 난 와인 여섯 잔을 벌었다. 야호.
방 안에서 샤오미 배터리 충전하고 이메일도 체크했다. 틈틈이 이런 순례기도 쓰고. 밤 9시가 넘으니 주인아주머니가 부른다. 저쪽 벽난로 있는 쪽에 술 먹으러 오란다. 포도 품종 비슷한 걸로 만든 술이 있다며 먹어보라고 권한다. 'Strong Strong'을 외치면서 말이다. 뭐 그럼 내가 한잔 먹어주지. 한 모금 아주 조금 마시는데 목에 탁 걸린다. 아주 독한 보드카보다 더 독한 거 같다. 그래서 나도 '쏘 스트롱'이라 외치니 웃는다.
순례자들이 벽난로 주위로 다 몰려들었다. 셀카도 함께 찍고 즐긴다. 나도 간간이 끼어드는데 대부분 스페인 순례자라 영어가 잘 안된다. 걍 농담 몇 마디 던지는 수준. 그래도 순례자들과 즐거운 첫 술자리였다. 돌아오니 불이 꺼져 있었다. 나도 곱게 펴둔 침낭 속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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