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Dona Novis Pacem

2017.10.16. Day 13

by 메추리

15 Dona Novis Pacem(평화를 주소서)
- 2017.10.16. Day 13


어제 오후 5시, 부르고스 성당 앞 빠. 같이 다니던 한국애들이 모였다. 간단한 맥주파티 그리고 오후 7시 미사에 참가했다. 부르고스 대성당 안에서 하는 미사에 갔는데 아 글쎄 한쪽 예배당에서 한국인 신부님이 한국어로 미사를 집전하는 게 아닌가? 보니 한국 성지순례 관광객 대상으로 하는 미사다. 편한 마음에 미사에 참가했는데 그만 미사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 거다. 내 죄가 너무 많아서 서럽고 감사해서 운 거다. 2년 전 산티아고 대성당 미사에서 운 느낌이랑 비슷하다. 펑펑 울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찐하게, 酒님을 찾았다.

이젠 제법 해도 넘어가고 불빛이 어울리는 시간이다. 성당을 비추는 은은한 조명이 있는데 어떻게 맨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건 부르고스 대성당을 무시하는 거지. 정답은 신의 물방울 와인이다.

지금까지 먹은 음식이 걷기 위한 식량이었다면 오늘 이 순간만큼은 혀가 호강하는 요리를 먹고 싶었다. 스페인 요리 몇 개와 오늘 메인인 와인을 시켰다. 해도 완전히 넘어가고 성당이 좀 더 조명에 선명해 보일수록 우리의 와인잔은 비워져 갔다. 그렇게 술은 들어가고 밤은 흘렀다.


앗! 어제 순례기를 안 썼다. 지금 눈 뜨니 새벽 4시.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머리가 띵하다. 나 개인과의 약속도 약속이니 피곤해도 써야 하고 마쳐야 하는데. 근데 이상하리 잘 안 써진다.

두 시간은 끄적인 것 같다. 이건 뙤약볕 아래 순례보다 더 힘들다. 침대에 누워 아이폰을 치켜들고 쓴다. 아이고 팔이야. 오늘따라 오타도 많이 생기고. 처음 40분 동안 쓴 것을 초판으로 해서 수정과 사진 선택 등 최종 편집에 들어가 6:10에야 완성했다. 이번엔 업로드가 문제다. 일단 포기하고 순례 출발 준비에 들어갔다.

6:50에 출발한다. 대도시 시내길은 화살표가 잘 안 보여 힘들다. 그래서 알베르게 문 앞에서 다른 순례자 나오길 기다렸다 출발했다. 뒤따라가니 화살표 신경 안 쓰고 좋다. 앞선 중년부부를 따라 1시간을 걸으니 이제야 도시를 벗어나게 된다. 부르고스가 큰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즈음에 순례기를 브런치에 업로드했다. 모바일 망 스피드 보면 욕이 절로 나오지만 순례길이라 참는다. ㅎㅎ

8시쯤 안개가 자욱하다. 해가 뜨면서 서늘한 바람이 불며 안개는 서서히 걷힌다.

9:15 11킬로 와서 첫 휴식을 갖는다. 하몽 넣은 샌드위치와 오렌지주스. 오늘 많이 가야 하기 때문에 든든하게 먹어둬야 한다.

10시 은은한 성당의 종소리, 뜨거워지는 햇살. 조금 더 걷다 발견한 아주 작은 성당, 기도 그리고 목걸이 걸어주시며 축복해주시는 스페인 할머니. 할머니는 세계 어디나 사랑이시다.

다시 걷는데 회사 박민회 팀장에게서 카톡이 왔다. 올 3월에 투자한 이태리 명품 구두 직거래 커머스 ‘제누이오’ 후속투자(Follow-on) 투심위(투자심사위원회) 의견을 물어본다. 곧 떠날 사람인데. 그래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 생애 마지막 투심위 의견서 쓸 기회 줘서 고맙네. 이제 VC 안 하려고 생각하니 이것도 매우 소중하다네”

잠시 뒤 회사 전부장에게서 온 이메일, 산업은행 펀드 임시조합원총회 개최 공문이다. 아, 이제 정말 끝나가는구나. 내가 맡은 대표펀드매니저도 내려놓으면 떠날 모든 준비가 되는구나.

작년 2016년 1월 회사를 만들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첫 펀드(101억원, 뭐 워너원 때문에 숫자 맞춘 거 맞다 ㅎ)도 작년 10월에 만들고. 아마 그때부터 즐겁지가 않더라고. 우울이 밀려왔다고나 할까? 무기력과 의욕상실, 거기에 노안까지 겹치니 더 밑바닥 상태가 오래가더라고. 내가 만든 회사인데 내가 의욕이 안 생긴다는 게 이해가 되시는가?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고. 그저 남성 갱년기로 치부하고 내 탓이겠거니 할 수밖에.

첫 펀드 결성총회 날 쓴 시만 봐도 그때 내 심정을 잘 알 수 있다.


우울에 대하여

와인잔 바닥이 보인다
많이 먹을까 봐
남아있던 병 안의 와인을
싱크대에 버렸다
취하면 안 돼
그냥 여기서 마쳐야 돼
오늘 좋은 일이 있었잖아
왜 적적해?
나에게 되묻지만
마음속 기쁨보단
뭔가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게
우울인가?
(2016.10.05. 오전 0:22 집에서 쓰다)


아 이 순간 선크림이 눈에 들어가 넘 따갑고 아프다. 눈물도 계속 나오고 비비니 더 따갑고. 또 햇살은 왜 이리 강한 거얏! 앞이 희미하니 어질어질하기까지 하다. 마치 술 취한 것처럼. 잠깐 쉬며 생수로 눈을 씻어냈다.

끝없는 고원 길이 펼쳐진다. 앞 뒤 내 시야에 어느 순례자도 없다. 지평선을 바라보며 걷는다. 갑자기 떠오른 ‘Dona Novis Pacem(도나 노비스 파쳄,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이 넓디넓은 고원에서 왜 평화를 외쳤는지 모르겠다. 뭐 내가 ‘세례 요한’도 아니고.


그래도 외쳤더니 이제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마음의 평화가 왔다고나 할까? 버리고 걷고 낮추고 걷고 고통받으며 걷고 축복받으며 걷고 목마름을 느끼며 걷고 자연에 감탄하며 걷고 매일 일출을 보며 걷다 보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미움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여유와 사랑이 들어찬다.

그렇게 고원을 한참 걸으니 분지 형태의 마을이 멀리 아래쪽에 보인다. 고맙다. 11:50에 20.97킬로를 와 점심을 먹다. 오므라이스, 바나나와 사과 하나. 물론 갈증 땜에 맥주도 한잔. 근데 아직도 10킬로 남았다는 건 아찔 그 자체다. 오늘 태양은 특별히 더 뜨겁다.

그늘 하나 없는 고원 벌판, 아무도 없다. 이 넓은 땅에 나 혼자 태양 아래 사투를 벌이고 있다. 도나 노비스? 존나 더버쓰!

Shit! 똥이다. 새벽에 깨서 출발 전 한번, 아침 먹고 한번, 점심 먹고 한번 이렇게 세 번 봤다. 이건 민폐다. 지나친 음주는 간에도 순례길에도 안 좋다.

2:24에 물 한 모금 먹으며 잠깐 휴식을 취하다. 끝없이 펼쳐진 직선 길, 뜨겁고 단조롭고 힘들다. 물집도 다시 아리고. 넘 아프고 지루해 고통을 잊고자 나중엔 거의 뛰다시피 했다.

3시 정각에 다시 분지 마을 온타나스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가 보이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은 첫째 날 이후 역대급 힘든 날이다. 47,478걸음으로 31.8킬로를 오다.

2017.10.17. 오전 2:44에 잠에서 깨어 알베르게 계단에 앉아 쓰다.

(Dona Novis Pacem, 온타나스 가는 길에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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