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7. Day 14
16 Before the Rain
- 2017.10.17. Day 14
어제 도착 후 맥주와 샤워를 마친 다음 온타나스 성당을 찾았다. 아주 작은 동네 성당이다. 오후 4시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가 진행된다고 해서 성당 내 비치된 한국어 해석이 있는 미사 순서지를 가져왔다.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는 이해는 어려워도 그 봉독 소리에서 음률이 느껴지고 아름다웠다. 미사 후 신부님께서 십자가 목걸이를 직접 걸어주시고 순례길을 축복해 주셨다.
이제 배를 채울 시간이다. 우리 숙소에 머무는 한국 친구들이 각자 배낭에서 라면을 한두 개씩 꺼낸다. 그것을 한데 모아 끓인다. 동네가 작아 햄도 못 샀지만 계란 6개 풀고 끓이니 이것도 제법 양이된다. 한국 라면은 언제나 진리다. 그리고 이어진 햄버거를 곁들인 맥주파티. 한 친구가 유머라고 얘기한다.
할머니랑 손자랑 TV를 보는데 고래도 비슷하고 상어도 비슷한 게 나오는 거다. 그래서 할머니는 손자에게, “아따, 저기 뭐다냐. 고랜겨 상어인겨?” 그 순간 TV에서 차분한 아나운서 목소리로 “이것은 고래상어다”라고 나왔다.
썰렁한가? 어제 직접 들으니 배꼽 빠지는 줄 알았다. ㅎㅎ
10시쯤 잠이 들었다. 순례기를 그날 쓰지 않았다는 것이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온 것 같다. 새벽 두 시에 눈이 떠졌다. 그리고 아이폰을 챙겨 문 밖으로 나갔다.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1시간 동안 순례기를 썼다. 참 이게 뭐라고. 쩝!
오늘은 오전 6:35 출발했다. 내가 묶은 방은 다 어르신들이 계셔서 5:30이면 눈을 뜨신다. 그리고 6시면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출발하신다. 오늘도 30킬로 가까운 일정이라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 바나나 2개를 먹은 후 1층 빠에서 갓 구운 크로와상이랑 커피를 먹었다.
구름이 많이 껴서 그런가 오늘은 더 어두운 것 같다. 혼자 출발하기가 그래서 함께 갈 순례자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태리 ‘줄제로’ 할아버지가 나오길래 함께 출발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헤드마운트 라이트가 어둡다고 함께 가자신다. 그래서 내가 플래시 비춰주며 1시간을 같이 걸었다. 이 할아버지가 발걸음이 많이 빨라 새벽부터 고생 좀 했지만 말이다.
별들이 조금 보이다 구름에 사라진다. 물소리 바람소리 처벅처벅 등산화 내딛는 소리 모두 좋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비를 예고하는 듯하다.
오늘 전까지 무려 13일 동안 비가 없었다. 힘들었다고는 하나 비올 때 순례길엔 견줄 바 안된다. 그리고 2주 만에 비가 온단다. 내 직장경력 20년, 비 없이 그저 순탄하게만 왔다. 이제 비를 맞겠지. 맞아야 하겠지. 그래도 지난 2주 동안 순례길 걸으며 단련된 것처럼 지난 20년 동안의 세월 동안 분명 강해졌을 거야. 아 이때 ‘Lee Oscar’의 ‘Before the Rain’이 딱이지.
7:50 먼동. 세상에 저런 색감은 본 적이 없다. 나뿐만 아니라 순례자 모두 ‘Oh my God!’을 연발한다. 차마 아름다운 일출을 향하여는 못하고 등지고 쉬를 하는데 이리저리 흔들리는 오줌발로 봐서는 오늘은 바람이 분명 세다.
9.04킬로 와서 8:20에 아메리카노 한잔 하며 첫 휴식을 갖다. 그리고 브런치. 이건 먹는 거 아니고 글 쓰는 브런치다. 어제 묶은 온타나스(Hontanas)는 심한 분지 지형이라 모바일이 잘 터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동네를 벗어나 첫 휴식을 가질 때 브런치에 순례기를 올린 거다.
다시 걷는다. 멀리 높은 언덕이 보인다. 9:50에 알토 모스텔라레스(해발 900미터)에 도착했다. 거기서 내려오면서 보는데 땅 색깔이 어떻게 이렇게도 이쁠 수가. 황토색 벌판 사이로 맨들맨들하게 드러난 길, 끊임없이 펼쳐진 구부정한 길에서 또 감동을 먹는다.
감동도 잠깐 길이 길어도 너무 길다. 발바닥 통증에 물집까지 있어 아린다. 그래도 견디고 걷는다. 한 참을 더 가서 11:31에 빠에 도착했다. 7-8킬로마다 나타나는 빠는 거의 오아시스 수준이다. 21.65킬로를 와서야 점심을 먹는다. 하몽과 계란 프라이를 시켰는데 주문하니 바로 넓적다리를 가져와 하몽을 썰어준다. 이렇게 먹는 하몽은 마르지 않고 촉촉한 게 맛이 다르다. 오렌지주스를 마시며 코스를 점검하는데 아직도 8.1킬로 남았다. 오 마이 갓.
점심 먹으며 쉴 때 등산화에 양말까지 벗고 발을 식혀둔 게 효과가 있는 듯하다. 물론 다시 등산화를 신으면 발이 익숙해지는데 10분 정도는 소요되지만 그 십 분만 지나면 이내 적응된다. 발도 환기가 필요하다.
길게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2015년 말 코그니티브 설립을 구상할 때 원래 김동환, 이범준이랑 같이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2015년 12월 범준이는 합류하지 않는다고 해서 잠시 고비가 왔고, 그것을 넘겨 2016년 1월 말 범준이 합류 없이 회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근데 두 달 전 결국 범준이가 유니온을 찍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달 말 내가 나간다. 밀려나갔나? 밀릴 내가 아니다. 더 잘하는 친구들이 하는 게 맞다. 난 내 길을 가면 될 뿐. 사실 작년 10월 이후 VC에 흥미도 잃었고.
발바닥, 뒤꿈치가 넘 아프다. 매번 이리 힘드니 8킬로 어떻게 간다냐. 내일 코스도 길던데. 비오기 전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가야 할 텐데. 갈 길이 멀어 오랜만에 음악을 튼다. 첫 곡으로 마이클 잭슨의 ‘Will you be there’가 나온다. 거기 누구 없소? 힘드오.
앞으로 나가기 힘들 정도로 앞바람이 세다. 비도 살짝 섞여 흩날리는데 아직 우비를 입을 수준은 아니다.
매일 저녁땐 그다음 날을 위해 술 좀 적게 마셔야지 하는데 막상 도착하면 술을 안 마실 수가 없다. 그만큼 고되단 얘기다. 여기 와서 하체는 건강해졌는지 몰라도 간은 더 손상된 듯하다.
바람 바람. 바람. 넘 세다. 세다.
언덕 너머를 보니 구름이 짙다. 분명 저 너머엔 비가 올 거다. 그래서 도중에 멈추고 배낭 커버를 씌우고 우비를 입었다. 그러고 있는데 옆을 지나가는 미국 여자애가 ‘What the hell!’하면서 비웃고 지나가는 게 아닌가. 아직 비도 안 오는데 우비 걸친다고. 그래 '왓 더 헬'이다. 게는 나를 앞서 저만치 가고 있다.
언덕에 다다라서 내려가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 거기 보니 그 미국애가 우비를 주섬주섬 꺼내 입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지나가면서 한마디 했다. ‘What the Hell!’
그렇게 흩날리는 빗속을 뚫고 8킬로를 달려 2시 정각에 오늘 목적지 보아디아 델 까미노에 도착했다. 43,786걸음으로 30.99킬로를 왔다.
도착해서 콜라를 한잔 하고 내 침대로 오는데 멕시코인 웹 프로그래머 이데가드가 노트북으로 로비에서 일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한마디 했다.
You are working while walking.
웃는다. 내 유머 코드는 이제 글로벌이다. ㅎㅎ
내일부턴 새벽 기온도 4도로 떨어지면서 비도 본격적으로 온다. 힘든 하루가 되겠지만 순례자는 내일도 걸을 거다.
2017.10.17. 오후 9:45 보아디아 알베르게 소파에 앉아 쓰다.
(알토 모스텔라레스에서 내려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