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8. Day 15
17 Weather the Storm
- 2017.10.18. Day 15
비가 흩날린다. 밖에 나가기가 귀찮다. 보아디아(Boadilla) 이 동네가 워낙 작아서 근처에 빠도 없다. 이 알베르게에서 저녁 먹을 수밖에 없다.
손빨래를 마치고 빨래를 처마 밑 야외 건조대에 널었는데 비바람 때문에 이내 건조대를 들고 실내로 옮겼다. 잘 마를까 걱정이다.
빨래를 마쳐도 아직 오후 4시다. 맥주를 먹으며 리디북스 페이퍼를 꺼내 ‘솔리튜드’를 읽는다. 고독에 대한 연구 부분이 나온다. 고독을 객관적 연구로 분석할 거냐 아님 홀로 외딴곳으로 가서 고독을 주관적으로 경험한 것을 기록하며 연구할까 그 사이에서 고민하다 저자는 후자를 택했다고 한다. 난 걸으며 고독을 느낀다. 온전히 걷는 시간만큼은 나와 나의 인내와 나의 내면과 대면하는 시간이다. 과거의 모든 화와 분노를 걸으며 순례길 바람에 먼지처럼 날려 버린다. 내가 죄가 많아 이 고통을 받으며 걷고, 이 고통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털어내고자 한다. 아직 모르겠다. 현재까진 많이 내려놨고 많이 털어냈다. 이틀 전 고원에서 간구한 평화가 서서히 오는 듯하다.
Weather the Storm. 이는 ‘폭풍우를 이겨내다, 고난을 극복하다’라는 뜻이다. 첨엔 ‘weather’는 날씨고, ‘storm’은 태풍(폭풍우)인데 어떻게 이런 뜻이 나왔는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그래서 무조건 이건 숙어다, 외워야 한다 하고 공부했단 기억만 난다. 오늘 글 쓰며 구글로 ‘weather’의 어원을 찾아보니 ‘wind’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하도 많은 날씨 변수 중 왜 바람이 날씨라는 보통 명사가 되었을까? 그리고 태풍을 이겨내는 도구는 다른 것들이 아니라 바람밖에 없었을까? 폭풍우도 바람인데 결국 바람으로 바람을 밀어낼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아님 폭풍우가 오면 날씨에 의존해 기다려 폭풍우가 다른 바람에 밀려나길 기다리란 뜻일까? 하튼 많은 생각이 드는 문구다.
어떻게 보면 고행을 하며 고통을 잊고, 금식하며 신에게 더 가까이 가고, 삼보일배를 하며 욕심을 내려놓고 하는 행위가 다 ‘weather the storm’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순례길 걸으며 고통받으며 고통을 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데 넘 아름다운 순례길은 매우 자주 고통 생각이 안 들게 한다. 이것도 문제다. 비와 뜨거운 태양이 더 괴롭혀 줘야 하는데. 가끔 폭풍우도 몰아쳐야 되는데. 그래야 다른 바람이 와서 이 폭풍우를 밀어낼 때까지 기다릴 텐데. 그것도 아님 앞으로 올 바람이 이 태풍을 몰아내길 기대라도 할 텐데.
맥주가 없어질 때쯤 늦게 도착한 한국 친구들이 샤워를 막 마치고 내려왔다. 몇 마디 얘기 나누다 함께 숙소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은 소고기와 콩을 넣은 수프와 소고기 스튜가 메인이었는데 비도 흩날린 궂은 날씨여서 그런지 뜨거운 국물은 한기도 가셔 주고 맛도 매우 훌륭했다. 넘치는 와인과 더불어 웃고 떠들고 모처럼 많이 웃었다.
저녁 멤버 중에 ‘이경로’라는 친구가 있다. 갓 서른 된 친구인데 제법 웃긴다. 전날의 ‘고래상어’ 얘기도 이 친구가 해준 거다. 웃기는지 믿지 못하겠다고? 그럼 지금부터 하는 얘기 들어보시라.
이 친구가 프링스 쌩장에서 하루 묶고 그다음 날 순례길 시작하는데 숙소에서 아침과 함께 커피를 큰 대접에 줘서 대접받는 느낌이 들었단다. ㅎㅎ
아직도 썰렁한가? 한 가지만 더 하겠다. 이 친구 이름이 ‘경로’라 함께 순례길 다니면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경로를 다 알려준다. 물론 가끔 ‘경로 재탐색 중’이 뜨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닌가? 그럼, 죄송하다. 대신 오늘 저녁때 만나면 한 대 때려주겠다 ㅎㅎ
오늘 잠에서 깨어 목이 말라 숙소 문 앞에 있는 자판기를 찾았다. 물 나오는 자판기가 꺼져있는지 작동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옆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았다. 새벽부터 콜라와 프로틴 바, 안 어울린다. 이건 아니다. 근육 만들러 온 순례길도 아닌데.
오전 7시에 함께 출발하기로 한 친구들이 안 나온다. 먼저 출발하려다 10분 정도 더 기다려 7:10에 함께 출발했다. 오늘 무리 중에 ‘경로’도 있으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다. ㅎㅎ
비가 오니 핑크색 먼동 없이 날이 밝아온다. 중세시대 수로(canal)를 지나 한 마을에 입성한다. 8:40에 첫 빠에서 휴식을 취하며 하몽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을 먹는다. 이제 7.68킬로 왔다.
비가 흩날리다 조금 심해졌다 다시 그치기를 반복한다. 계속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변 길로 걷는다. 바람도 심하게 분다. 12시 무렵이 되자 허기로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오늘 목적지 까리온(Carrion)은 5킬로 넘게 더 가야 한다. 까리온까지 한 번에 가기 까리하다고 했더니 애들이 웃는다. 그래서 빠에서 점심을 먹었다.
비 오니 추워서 뜨거운 수프와 닭고기 스튜를 시켰다. 넘치는 와인은 항상 과분하다. 알코올과 단백질로 체력을 보충하고 다시 걷는다. 옆에서 차는 매연을 뿜으며 쌩쌩 달린다. 비는 이제 그쳤다. 멀리 마을이 보인다. 앞사람을 계속 따라간다. 그리고 까리온에 있는 알베르게에 무사히 도착한다.
오후 2:10 도착. 28.63킬로 39,091걸음.
2017.10.18. 오후 9:54에 까리온 알베르게 침대에 누워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