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9. Day 16
18 Move to another room
- 2017.10.19. Day 16
‘클라우디’라는 딸과 함께 순례길을 걷고 있는 스페인 아빠가 있다. 딸도 너무나 귀엽다. 내 첫째 딸과 동갑인 딱 열 살인데 무거운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다니는 모습 보니 부럽다. 우리 딸은 개 난리 칠 텐데. 아빠가 딸을 아침엔 뽀뽀해서 깨우고 딸 걷는 모습 동영상 찍어 편집하고 와이프랑 자주 영상 통화하고 참 다정다감하다.
어제 도착 후 바로 샤워와 손빨래를 하고 빠를 찾아 맥주 두 잔 했다. 이젠 일상이다. 스페인 소 내장 스튜와 양송이 타파스를 함께 시켰는데 상당히 맛나다. 그리고 슈퍼에서 빵, 사과, 하몽, 치즈 등 앞으로 며칠간 먹을 아침거리 장만을 했다.
여기 알베르게는 2층 침대가 없다. 전부 1층 침대다. 순례길 이후 알베르게에 1층 침대만 있는 것도 처음이다. 널찍이 떨어져 있는 단층 침대가 주는 안정과 평화가 느껴진다. 다들 1층 침대를 먼저 차지하려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
따로 꾸며진 거룩한 분위기의 기도실도 좋다. 홀로 그곳을 찾다. 그리고 순례 일정 동안 지켜주심에 감사를, 앞으로 갈 길에도 축복을 기도했다.
저녁 만찬. 한국 친구들이 푸짐하게 차렸다. 참치 마요 덮밥과 샐러드, 거기에 삼겹살과 목살도 구웠다. 여기에 와인 세병이 함께 한다. 삼겹살에 버섯도 같이 구운 게 보인다. 한 친구가 나에게 말한다. “선생님 버섯 좀 드세요”. 그래서 내가 “어머 이건 너무 야한 채소야 ㅎㅎ. 버섯!” 그러자 또 몇 명은 웃는다.
오늘은 어제 먹다 남은 참치마요 덮밥에 남은 삼겹살을 투하하여 볶음밥으로 만들어 아침을 해결했다. 난 전날 아침이 부실해서 힘든 기억이 나 미리 빵에 하몽과 치즈를 얹어 샌드위치를 해 먹었다. 옆 테이블의 프랑스 할머니가 수프와 스파게티도 나눠주셨다. 디저트로 코코아까지, 넘 풍성한 아침이다.
이렇게 아침을 먹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17킬로 지점까지 중간에 식사할 빠가 전혀 없다. 그러니 다른 외국 친구들도 다 풍성히 먹고 출발한다. 덕분에 출발시각도 7:30으로 평소보다 늦어진다.
끔임 없이 이어진 직진 코스, 뒤에 떠오르는 태양. 비 온 후 맑은 하늘이 아름답다. 먼동 터오기 전 은은한 파란빛, 그리고 곧 붉음이 그 파랑을 밀어낸다.
밭갈이가 끝난 벌판, 저런 자갈밭인데 뭐가 자라나? 그래서 스페인에서 Zara가 나왔나? 막 던져서 미안하다. ㅋㅋ 지나가다 보니 아직 추수 안 한 옥수수밭이 나온다.
9:55분 첫 휴식을 취했다. 10.21킬로. 트럭에서 아주(?) 간단한 것들만 파는 간이 빠다. 여기서 커피만 한잔하다. 트럭 주위에는 노상방뇨금지 팻말이 많이 붙어있다. 다들 비슷하게 행동하나 보다. 쉬고 커피도 한잔하니 마렵다. 20-30미터 돌아가니 방뇨의 흔적이 있는 곳이 있다. 거기서 급한 건 해결했다.
오늘은 구름이 특히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을 뭘로 표현해야 할까? 첫 빠도 곧 나타나는데 마지막 힘내라는 차원에서 우리 순례길 공식 가수 ‘경로’의 노래를 들어보기로 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경로 이 친구가 주섬 주섬 뭔가 꺼낸다. 바로 스마트폰으로 ‘지금 이 순간’의 반주를 튼다. 짜슥, 준비된 놈이다. 그리고 걸으며 펼쳐진 ‘지금 이 순간’ 감상 시간. 지금 이 순간은 진실로 아름다운 자연과 선율이 어우러진 행복한 시간이다. 노래가 끝나고 내가 한마디 했다.
“우리 가요 한번 가요”ㅎㅎ
12시 정각 마을 빠에 도착. 여기까지 18.98킬로 왔다. 오래 기다렸던 만큼 거의 모든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며 쉬고 있다. 여기서 5유로 하는 수제 왕햄버거를 맥주와 함께 먹었다. 배 터진다.
그리고 또 지루하게 이어진 길. 그래도 약간의 오르막은 기분을 좋게 한다. 뻥 뚫린 갓 포장된 도로, 거기서 네 명이 도로 한 복판에 나란히 걷는 시늉을 하며 비틀즈를 흉내 내다. ㅎㅎ. 어린 친구들이 좋아한다.
그리고 계속 걸어 3:15에 오늘 최종 목적지 테라디요스에 도착했다. 29.17킬로 41,436걸음.
도착 후 맥주 한잔 하며 쫄지마창업스쿨 관련 일 좀 처리했다. 그리고 샤워하러 들어갔다. 입구 바로 있는 첫번째 칸에 들어갔는데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 좋다. 그런데 비누칠을 다 했는데 물이 안 나오는 거다. 이거 참 난감하네. 좀 기다리면 나올 거 같아 머리에 샴푸까지 했다.
안 나온다. 난감하다. 샤워하다 샤워룸에 갇히다니. 어떻게 한담. Is anybody here? Help me 부르고 난리 쳤다. 남녀공용 화장실 겸용 샤워실인데 분명 이 공간에 사람이 있는데 아무도 대꾸를 안 한다. ‘경로야~’도 부르고 해도 답이 없다가 10분 후 한 사람이 다른 샤워룸엔 물 나오니 옮겨보라 한다(Move to another shower room). 근데 어떻게 옮긴담? Any woman here? 해도 답이 없다. 맨 손으로 그곳만 가리고 옮겨? 아님 비누 그대로 있는 채로 팬티라도 입고 옮겨? 잠시 고민하다 팬티 입고 조심히 문을 열고 옆 칸으로 옮겼다. 안에 여성이 한분 있다. 잘 입었다. 다행히 옆칸은 물이 나온다. 샤워하는데 시간 꽤 걸렸다. 쩝!
뭔가 꽉 막혔을 때는 가끔 옆방으로 옮겨도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바로 옆으로만 옮겨도 막혔던 물꼬가 터지기도 한다. 난 지금 옆방으로 옮기는 준비를 하기 위해 여길 걷고 있다. 어쩌면 이 순례길이 비누칠한 채로 팬티를 입고 옆 방으로 옮기는 과정일 수 있다. 그 옆방에 가면 이 비누를 씻어낼 수도 있겠지.
오늘도 이렇게 간다.
2017.10.20. 오전 8시 오늘 순례길 떠나기 직전 쓰다.
(이경로 군이 순례길 중 ‘지금 이 순간’ 노래를 부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