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0. Day 17
19 순례자 아님 술례자?
- 2017.10.20. Day 17
어제저녁은 숙소에 있는 빠에서 해결했다. 10유로 하는 순례자 메뉴는 비교적 훌륭했다. 순례자 메뉴의 가장 큰 장점은 항상 와인을 준다는 점이다. 와인 인심도 후해 더 달라고 하면 거의 더 주시는 편이다. 매일 술이니 이거 뭐 순례자인지 술례자인지 모를 정도다.
어제는 우리가 흥겨워 보였는지 옆 테이블에 앉은 프랑스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와인까지 주셔서 와인은 넘치고 넘쳤다. 와인이 들어가니 각종 유머가 난무한다. 그중 몇 가지만 옮겨본다.
어제 열심히 걸은 한 친구가 코피 흘렸다고 해서 ‘너 열심히 걸었구나’ 했더니 코팠다네 ㅎㅎ
사흘 뒤면 레온(Leon)으로 갈레옹. 싸리아(Sarria)에서 몸살이야. 잔이 비었으니 Beer 채우자.
아무 말이나 막 던져서 미안하다. 오늘부턴 자제하겠다. ㅎ
생일 맞은 바르셀로나 할아버지가 와인 한 병을 더 쏘셨다. 그래서 한국어로 생일 축하 노래 불러드리니 동영상으로도 찍고 난리다. 한데 어우러져 노래 부른다. 순례자는 남녀노소 불문 모두 친구다.
산티아고까지 가지 못하고 급한 일 있어 도중에 돌아가는 한 친구가 있었다. 쌩장부터 함께 걸었던 단짝 친구가 아쉬움에 눈물 흘린다. 본인은 얼마나 더 아쉬울까? 그 친구는 펑펑 운다. 그 마음 안다. 마치지 못한다는, 좋은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그 아쉬움. 자신의 육체 때문에 중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그만둔다는 그걸 알기에 모두가 슬퍼한다.
순례자는 모두 착하다. 악한 사람이 10킬로 배낭을 메고 매일 25킬로씩 걷지 않는다. 그러면 미친 거지. 그래서 대부분 다른 순례자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준다. 스페인 사람들도 순례자에겐 관대한 편이다. 비포장 도로를 걸을 때 지나가는 차를 보면 먼지 많이 날까 봐 순례자들 옆을 지나갈 땐 속도를 많이 늦춘다.
계속된 와인의 행렬, 그리고 한 친구의 침대 혼동 사건, 포도주 파전 흔적 등이 있었다. 마침내 한 친구가 금주를 선언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길. ‘금주(今週)까지 만이다’ ㅎㅎ
숙취로 인한 늦은 7시 기상, 숙소 빠에서 에스프레소 한잔 후 8:14이 돼서야 출발. 역대 최고 늦게 출발한 거다.
걷다 보니 개구리 소리가 들린다. 앗! 사이렌 소리다. 아직 술이 덜 깼다.
오늘은 천천히 걷는다. 가끔은 이렇게 걷는 것도 좋다. 오늘은 두 색깔이 잘 어울린다. 흐린 하늘의 회색빛과 벌판 위 황톳빛. 회색이 이렇게 아름다웠었나?
배낭 가방 열린 용현이. 그걸 보고 여권이 없는 사실 발견하다. 이전 마을로 용현이 다시 가고. 갔는데 여권은 없고.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 일행 중에서 여권을 챙겨놓은 거다. 어제 술 마시고 마지막에 나온 한 친구가 탁자 위 남은 물건 다 챙겨 자신의 배낭에 넣어둔 거다. 천만다행이다. 이 친구는 이번에 여권 잃어버리면 두 번째다. 이게 다 어제 술자리의 영향이다. 다시 우리가 순례자인지 술례자인지 ㅎㅎ
10시 휴식. 6.73킬로 와서 주스 한잔.
그리고 살짝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다. 멀리 보이는 사아군(Sahagun), 그리고 순례길도 아닌 추수 끝난 넓은 밀밭을 가로질러 걷다. 마치 조폭처럼. ㅎㅎ
12시 정각 사아군 내 빠에 도착했다. 14.43킬로 걸음. 여기서 볼로네즈 스파게티를 먹었다. 양이 살짝 적은 게 흠이지만 역대급 맛이다. 그리고, 사정상 버스 타고 레온으로 떠나는 Y를 보냈다. 눈물은 글썽거렸지만 다들 울진 않았다. 정이 뭔지. 함께 고생하며 피레네 산맥을 넘고 2주 가까이 힘든 길을 걸어온 친구를 보내는 거라 그런지 애잔하다. 그렇지만 만남이 있음 헤어짐도 있는 법이고, 아쉬움이 있어야 다시 순례길도 오게 되니 마냥 슬퍼할 필요는 없다. 남은 자들은 또 걸어야 한다. 에고 발바닥 아파.
식사 후 슈퍼인 DIA에서 삼계탕 꺼리를 샀다. 넓은 파스타 면도 사서 남은 국물에 닭칼국수도 해 먹을 거다. 오늘 저녁은 풍성하게 말이다. 술은 빼고. ㅎㅎ
2:22에 갈림길에서 잠시 쉬다. 갈림길에서 헷갈리지 않게 친절하게 한국어로 설명해 놓은 게 있다. 순례자들은 다 친절한 거 같다.
메세타(Meseta) 고원. 이베리아 반도 중앙에 있는 대고원을 말한다. 산이 안 보이고 끊임없이 광야가 펼쳐진다. 그늘도 거의 없고 길도 거의 직선이다. 흐릴 땐 그리 힘들지 않지만 해가 뜨면 그 열기에 걷기가 힘들다. 눈도 시릴 정도로 햇살은 강렬하다. 그래도 걷는다.
매번 마을이 보이면 거의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힘이 빠진다. 그런데 마을이 보이고 나서도 최소 30분(2킬로) 이상 걸어가야 한다. 이때가 제일 힘든 거 같다. 당일 코스가 길던 짧던 별 차이는 없다.
3:55 오늘 목적지 Bercianos(베르시아노스)에 도착. 25.74킬로 36,672걸음.
그런데 기부제 숙소가 저녁 식사가 안된다고 해서 잠시 고민했다. 오늘은 기필코 삼계탕을 해 먹어야 된다는 일행들의 핏발 서린 의지가 보였다. 이거 먹으려고 사아군에서 8킬로 가까이 닭 세 마리, 쌀, 대파, 양파, 파스타면을 메고 왔는데.
식사되는 곳은 유일하게 근처 Santa Clara Albergue다. 근데 이곳엔 낮은 가격대 방은 없고 45유로 하는 2인 1실 방만 있다. 그래서 내가 바로 잔머리를 굴렸다. 나와 다른 1명만 비싼 숙소로 옮기고 그 주방을 함께 쓰기로 결정했다.
결국 4:27에 1킬로를 더 와서 오늘 26.7킬로 걷고 도착했다.
2017.10.21. 오전 9:34 엘부르고 빠에서 3.5유로짜리 신라면 먹으며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