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5. Day 12
14 Over the Fog
- 2017.10.15. Day 12
어제는, 아니 진짜 그 전날은 술을 많이 먹었다. 지나친 흥겨움과 감동은 주님을 부르는 듯하다. 일요일을 맞아 성당 미사에서 첫 번째 주님을, 성당 앞 빠에서 두 번째 주님을 만났다. ㅎㅎ
그래 10/14일은 프렌치 모녀 까뜨리나와 로하를 만났다. 보통 젊은 모녀나 부자가 같이 다닌 경우는 비행청소년일 경우가 많다고 한다. 순례길 걸으면서 인간 되라고. 그런데 이 모녀는 딸이 먼저 산티아고 가자고 해서 엄마가 33일 휴가를 냈다고 한다.
우리는 ‘이방인(레뜨랑제)’을 쓴 까뮈 얘기로 수다를 즐겼다. 사실 이방인은 처음 고등학교 시절 접하고 읽었을 때 나를 충격에 몰아 놓았던 책이다. 그리고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책이기도 하다. 이방인의 마지막 구절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이제 내게 남은 소망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까뮈의 이방인 중에서
내가 빠뜨리샤 까스 가수 좋아한다니 놀란다. ㅎㅎ 돈까스 형태의 돼지 스테이크와 더불어 몹시 흥겨운 저녁자리였다.
방에 돌아왔는데 젊은 리투아니아 커플이 한 침대에 누워 가관이다. 이럴 땐 자리를 비켜주는 게 도리다. 길거리를 배회하다 빠에 들렸다. 빠에서 맥주에 쿠바 아바나 몬테크리스토를 빤다. 이런 것도 순례다. 한참 시간을 때웠다. 지금쯤 들어가면 괜찮을 거다. ㅎㅎ
오늘 아침 6:30분에 출발하려고 했으나 문이 잘 안 열려 한 순례자의 도움을 받아 6:43에 출발했다.
구름이 꽤 있다. 그리고 자욱한 안개. 큰 나무에서 나는 푸드덕 소리. 불빛을 비춰보니 매가 사냥 중인 거다.
안개가 너무 껴 앞이 잘 안 보인다. 마을 나설 때 첫 화살표 보고 3킬로 내내 화살표를 못 봤다. 앞선 친구가 화살표 계속 안 보인다고 불안해한다. 내가 구글맵 켜서 이 길이 다음 마을까지 맞다고 알려주었는데도 계속 의심하는 눈치다. 실은 넘 안개가 자욱해 안보이니 나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난 구글맵을 믿는다.
좀 더 걸으니 100만 년 전의 원시인류가 발견되었다는 Atapuerca(아타푸에르카)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 순례자 무리들도 발견하고 안도한다. 나에겐 원시 인류보다 더 소중한 무리다. ㅎㅎ
그다음 길은 자갈밭 정도가 아니라 돌뭉치가 난잡하게 널린 가파른 언덕이다. 손전등 없인 오르기 불가능할 정도의 돌산이다. 새벽 순례길 중 제일 힘들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땀 흠뻑 젖어본 것도 처음이다. 쉴 겸 오줌이나 싸자. 졸졸.
추석 한가위 보름달이 떴을 때 출발한 순례 일정도 열흘이 넘어가니 달도 많이 왜소해진다. 이젠 그림자를 보이게 할 힘도 없는 듯하다. 가녀리게 떠 있는 초승달, 그것도 구름에 가려 살짝살짝만 보인다.
안개 너머 보이는 정상의 십자가, 새벽의 스산함과 짙은 안개로 인해 신비로워 보인다. 안개가 왜 안 개나 했는데 산 너머는 안개가 한 개도 없다. 라임 어떤가? ㅎ
안개 너머에 안개가 걷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자신만의 확신을 가지고 안개로 인해 눈앞이 희미하고 미래가 불안해도 믿고 나아가야 한다. 분명 안개 저 너머(Over the Fog)엔 맑은 하늘과 새로운 마을이 있을 것이다. 그걸 믿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
산 내려와 갈림길에서 정식 가리비 표지판은 직진을, 노란색 화살표는 왼쪽을 가리킨다. 난감하다. 앞서가는 사람이 직진하길래 한참을 따라가다 전날 만난 화가 아저씨가 얘기한 게 생각나 바로 다시 되돌아와서 작은 마을 통과하는 왼쪽 길을 택했다. 이 길이 부르고스 공장지대를 관통하지 않는 좀 더 좋은 길이라고 했거든. 길이 구부정한 게 이쁘다. 아침도 먹을 수 있겠다.
거짐 10킬로를 와 9:15에 아침식사를 했다. 9.97킬로. 스페인식 순대와 계란이 들어간 들어간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 그리고 먹은 딸기주스. 든든하다.
부르고스 대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갈림길이 제법 많다. 양쪽 길 다 가능하다는 표지판이 있어 선택을 계속해야 된다. 옵션을 주니 되려 망설이게 되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또 갈림길에서 잠시 멈찟 하는데 자전거 순례자가 왼쪽 길을 가라고 한다. 강 따라가면서 걷는 이쁜 길이라며.
은행나무 숲 노란색의 물결이다. 실로 아름답다. 노란색 은행잎에 노란색 화살표. 강을 따라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걷는 길, 아름다운 가을날 이쁜 산책 느낌이다. 강가의 은행잎은 이미 모두 노랗게 물들었고 강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들은 초록을 간직하고 있다. 노랑과 초록 그리고 파란 하늘의 조화가 멋들어진다. 이게 가을이다 라고 알려주는 샘플 같다.
길이 너무 이뻐 은행잎 모아 위로 던지며 동영상 찍고 난리를 쳤다. 함께 동행하던 두 동생도 나의 난리에 동참하며 모두 흥겨워한다. 그렇게 강변 산책로에서 한 시간 넘게 즐겼다. 이번 순례길 중 단연 최고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 비교적 이른 1시 정각에 부르고스 성당 옆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34,557걸음으로 23.88킬로를 왔다.
샤워, 빨래 후 시원한 맥주 한잔 한다. 당연 사이즈는 그란데로 ㅎㅎ. 여기서 순례자 친구들 다 만났다. 바로 보이는 부르고스 대성당을 앞에 두고 맥주가 맥주를 또 부른다. ㅎㅎ
고딕 양식의 부르고스 대성당, 뒷 건물이 보이게 투영된 설계 방식이 인상적이다. 첨탑에선 가우디가 살짝 보인다. 위대한 유산 뒤에 위대한 건축가가 나온 듯하다.
아름다운 밤이다.
2017.10.16. 새벽 4:40에 침대 누워서 쓰다. 아~ 팔아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