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Coming Back

2017.10.22. Day 19

by 메추리

21 Coming Back
- 2017.10.22. Day 19


저녁은 제육볶음이다. 첨엔 밥을 해서 제육볶음 덮밥으로 나중엔 파스타 면을 삶아 제육 스파게티로 먹었다. 다 맛있었다. 특히 제육 스파게티는 별미였다.

숙소 야외 탁자에서 어울려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이태리 할아버지가 은색 잔을 들고 와인 좀 달라고 오셨다. 와인 병엔 술이 없어 내 잔에 남은 와인을 따라 드렸다. 그리고 잔을 부딪치며 Cheers를 외치는데 그 할아버지가 미사용으로 쓸거라 하신다.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며 부끄러워진다. 새 와인을 드릴걸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숙소 들어왔는데 키친 식탁에서 가족 미사를 드리고 계신다. 이 죄스러움 어떻게 하지? 어쩔 수 없이 주님께 의지하기 위해 2차를 갈 수밖에 없다.

10시까지만 빠가 열어서 맥주는 두 잔씩만 마시고 알베르게로 복귀했다. 여러 얘기를 나눴다. 배철현 교수의 ‘신의 위대한 질문’, 철학, 인문학 얘기 등. 경로가 열심히 들어줬는데 고맙다.


다음날, 알베르게에서 준비해 준 커피, 주스 그리고 가벼운 스낵으로 아침식사 후 7:55에 출발했다. 아침 기온 2도. 춥다.

춥지만 너무 아름다운 먼동에서 넋을 잃다. 어떻게 저런 색깔이 가능할까? 날이 추워지면서 먼동이 더 이쁜 것 같다.

아름다움도 잠시 생각보다 넘 춥다. 손끝도 아린다. 오히려 기온도 내려갔다. 지금 1도. 서리도 하얗게 내리고. 이리 추워도 되는 건가?

9:20, 저기 빠가 보인다. 뜨거운 태양 아래 빠를 발견한 때 보다 기뻤다. 사람은 더위보다 추위에 더 약한 건가? 하튼 첫 빠까지 6.3킬로 걸었다. 빠 안은 추위를 녹이려는 순례자들로 빼곡하다. 따뜻한 또르띠아와 아메리카노가 들어간다. 몸이 좀 녹긴 하다.

9:50에 빠에서 나왔는데 추위는 살짝 누그러진 듯. 그래서 2시간을 내리 걷고 있다. 걸으며 세무사 시험 최종 결과 기다리고 있는 경로에게 스티브 잡스 얘기, Valuation 방법 등에 대해 떠들었다. 목이 아프다. 마침내 12시쯤 레온에 진입한다. 이제 숙소까지 3킬로 남았다.

잠시 쉬며 뒤따라오는 일행들을 기다렸다. 다 도착했을 때 어제 칼로 이름도 각인한 내 지팡이 미노(MINO)를 경로에게 주었다. 토리는 아영이에게. 나는 다녀왔지만 아직 산티아고를 못 간 미노와 토리에게 산티아고까지 잘 입성하기를 바라며 간단한 전달식을 가졌다. 이게 뭐라고 괜히 애잔하다.

12:34에 레온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알베르게 이름이 Check-In Albergue이다. 이름 하나 특이하다. 체크인 알베르게에 체크인하다니. 말장난인가?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다 체크인했다. 난 그 앞 빠로 직행했다. 18.33킬로 24,933걸음. 도착했는데 알베르게로 안 가고 빠로 와서 기다리니 기분 은근 묘하다. 진짜 오늘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홀로 앉아 있으니 여러 생각이 든다. 갑자기 떠오르는 시상이 있어 일필휘지 느낌으로 써 내려갔다. 어쩌면 이번 순례 일정을 정리하는 시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백수로소이다

나는 백수로소이다
조선 땅에 태어나
남의 시선 의식 않고
자유롭게 떠나고
지멋대로 살다
결국 빈 손으로 돌아온
난 백수로소이다

나는 백수로소이다
재미를 쫓아
그것만을 위해 살아온
그게 전부인 줄 아는
자유인 인척 우기는
나는 백수로소이다

매일 술을 마시고
무거운 배낭을 메며
뙤약볕 아래
먼지 자욱 자갈길을
발가락 물집과 함께
걷기만 하는
나는 백수로소이다

돌아가도 돌아갈 데 없는
나는 순례하는 백수로소이다


일행들이 알베르게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우린 ‘Wok’이라는 중국식 뷔페집으로 가기로 했다. 40분을 넘게 걸어 도착한 식당, 다들 굶주린 늑대처럼 중국 해물요리들을 해치우기 시작한다.

다시 걸어 레온 대성당이 있는 구시가지로 들어왔다. 간단히 사진도 찍고 구시가지를 즐기다 랑페(Renfe) 기차역으로 이동했다. 경로가 끝까지 경로를 책임져 주었다. 고마운 녀석. 다른 모든 친구들도 역에서 나를 배웅해준다 넘 고맙다. 한국 오면 크게 술 한잔 사야겠다.

5:5분 기차역에 들어와 기차 타기 위해 대기하다. 오늘 레온 기차역까지 27.09킬로 36,975걸음.

5:20에 기차를 타다. 고속으로 달리는 기차에서 바라본 메세타 고원, 광활하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이젠 속이 다 시원하다. 이 거리를 다 걸어왔다니 나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기차 안에서 평화롭게 음악을 랜덤으로 트는데 마침 김동규가 부른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나온다. 광활한 고원, 끝없는 벌판, 아득한 지평선 참으로 아름답다. 지금 이 순간 태양빛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정말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이다.

고원을 고속 열차로 한 시간 정도 달리니 이제야 산이 나타난다. 멀리 보이는 일몰도 내 여정의 종료를 알려주는 듯.

7:58에 마드리드 도착. 바로 관광객 모드로 전환하여 8:10에 택시 타고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 8:30에 도착. 샤워 후 호텔 식당에서 한잔 하며 순례 일정을 맘 속으로 정리하다. 마드리드 호텔 와서 체르베싸(맥주), 뿔뽀(문어) 우노(1개) 하니깐 종업원들 다 놀란다. ㅋㅋ 뿔뽀는 약간 불향이 있는 게 넘 부드럽고 맛났다. 역시 스페인은 뿔뽀가 진리다.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 일정도 마쳐간다. 오늘까지 날자로는 19일을 걸었고, 걸음수로는 738,786걸음을 왔으며, 코스상 거리는 447킬로, 실제 걸은 거리는 526.7킬로이다. 가장 많이 걸은 날은 첫날 쌩장부터 론쎄스바예스까지 구간으로 32.9킬로를, 가장 적게 걸은 날은 아홉 번째 날로 나헤라에서 싼토도밍고까지 22.33킬로를 걸었다. 하루 평균 27.7킬로를 걸으며 맥주 네 잔과 와인 반 병을 마셨고, 평균적으로 7유로 하는 알베르게에서 잤으며 비용은 비교적 풍족하게 하루 40유로를(6만 원 조금 안되게) 썼다. 400킬로 넘게 걷는 동안 체중 4킬로가 빠졌다.

하루 평균 두 시간은 순례기를 썼고, 순례기당 평균 8장의 사진과 함께 업로드했다. 평균 업로드에 10분 이상 걸렸고 순례기당 평균 100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전체 32일 일정으로 봤을 때 2년 전 걸었던 싸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 구간을 포함하면 내가 마무리하지 못한 구간은 전체 8백 킬로 구간 중 레온에서 싸리아까지 8일, 200킬로에 해당하는 구간이다. 만약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 걷게 된다면 총 세 번에 나눠 걷게 되는 셈이다. 8일 코스 정도면 주말 끼고 1주 휴가 내면 충분히 올 수 있는 일정이다. 그런데 조만간 다시 올진 모르겠다. 코스 도장깨기도 아니고 이걸 완성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체 순례길 구간을 다 걷지도 않았으면서 순례길을 다 안다고 할 수 없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해. 8일 코스를 다 채운다면 다시 여기 안 올 거 같아. 언제든 와야만 하고 가볍게 올 수도 있고 힘들 때 돌아갈 곳 하나 정도는 간직하면 좋찮아? 그걸 빨리 써버리고 싶지는 않아. 최소 10년은 아껴둘 거야.

스페인에서 마지막 밤은 이렇게 저물어간다.


2017.10.23. 오전 8:41 마드리드에서 파리 가는 저가항공 비행기 안에서 쓰다. 아 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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