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Delete

2019.02.23. Day 21

by 메추리

23 Delete
2019.02.23. Day 21

세번째다. 벌써.

전체 카미노(순례길) 800킬로 중 못 걸은 레온에서 싸리아까지 200킬로가 이번 구간이다.

인천에서 환승지인 터키 이스탄불까지 12시간 20분, 마드리드까지 4시간 35분, 마드리드에서 기차로 2시간 20분을 달려 오후 5시 2년 전 두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친 레온에 도착했다. 항로로 17시간, 육로로 2시간 거기에 대기시간 합하면 레온까지 오는데 22시간 걸린 셈이다.

왜 이런 생고생을 하면서 또 카미노(순례길)를 찾았을까? 바로 여기서 알려주면 재미없지. ㅎㅎ

다시 하루 전으로 돌아가자. 2/22일 금요일, 회사 근무를 마치고 급하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미리 준비해둔 배낭을 차에서 꺼내고 옷도 갈아입어야 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차 키를 찾았는데 안 보이는 거다. 컥. x 됐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불러놓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서 가져와야 되나? 이번엔 못 가는 건가? 왜 없지? 등등.

그러다 평소에 거의 넣어두지 않던 가방 한 구석에서 겨우 찾았다. 이미 멘탈 나간 상태다. 후다닥 옷 입고 짐을 다시 정리해 넣었다. 택시를 탔는데 아뿔싸 순례기 글 편히 쓰려고 가져갈 아이패드를 빠뜨린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작은 아이폰 키보드와의 사투인 것인가? 쩝!

공항은 비교적 일찍 도착했다. 스페인에서 쓸 현지 유심도 찾고, 여행자보험도 가입하고, 이마트24에서 라면과 참치캔도 샀다. 세번째라 여유 부린다고 해야 하나? ㅎㅎ 그 대신 옷은 극도로 줄였다.

배낭을 보내기 위해 짐을 제어 보니 8.6킬로 정도 나온다. 거기에 기내에 들고 탈 작은 크로스백도 제어 보니 1.6킬로다. 전체 무게 10킬로 수준으로 제법 예전보다 다이어트했다.

매번 순례길 올 때마다 책 한 권은 가지고 온다. 첫번째 올 땐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 생존기를 다룬 ‘마션’을, 두번짼 파타고니아 격리된 곳에서의 고독을 적은 ‘솔리튜드’를 이번엔 최근에 꽂힌 창조와 창의력을 위해 없애는 것을 강조한 ‘딜리트’를 가져왔다. 400페이지가 넘는 제법 두꺼운 책인데 벌써부터 무게가 걱정이다. 빨리 내 배낭에서 Delete 시켜야 하는데. ㅋ 기다려라. 곧 될 테니.

12시간의 비행을 거쳐 비 내리는 새벽녘에 동서양이 교차하는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이 교차지에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환승을 해서 4시간 반을 더 날아 오전 11시 무렵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마드리드는 고향 같다. 외국 온다는 느낌이 없다.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점심으로 체르베싸(맥주)에 하몽까지 곁들이니 오랜 외국 생활 후 고국으로 돌아와 김치찌개를 먹는 것과 흡사 다를 바 없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이제 스페인 도착한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미리 예약한 레온(Leon) 행 기차표가 오후 2:40이라 좀 더 앞당겨 갈 수 있을까 해서 알아보다 현지카드만 되는 자판기 기술상의 문제로 무산된 아쉬움만 빼면 모든 게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오후 1시. 따뜻한 햇살. 그리고 꽃. 순간 핑 돈다. 태양과 꽃이 겹쳐 보이고. 너무나 아름답다. 봄이다.

2:30에 기차를 타다. ‘타다’ 탄 건 아니고. ㅎㅎ 기차 타기 전 라인으로 직원들에게 다음 주 휴가라는 사실을 전달했다. 그리고 다시 읽는 책 ‘딜리트’. 이제 2시간만 달리면 레온이다.

딜리트의 저자 김유열은 EBS PD로 잡다하게 많은 프로그램으로 특색이 없고 정체되었던 EBS를 어린이와 교육 다큐멘터리 중심으로 바꾸어 600%의 시청률 상승을 이끈 장본인이다. 편성을 개혁할 때 본인이 평소 가지고 있었던 노자의 사상을 그대로 실행한 것이고 그것을 축약해서 얘기하면 ‘딜리트’이다. 버려야 채워지고 줄여야 창의력이 생긴다. 노자가 숱하게 얘기한 배워서 고정관념으로 잡힌 것들을 버리고 아기의 상태로 돌아가야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김유열님이 기획한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인문학의 폭을 넓힌 나로서는 특히 이 책이 감명 깊다. 르네상스 인문학의 거장 김상근 교수님의 강연과 노자사상의 거장 최진석 건명원 원장님의 동양철학 강연 모두 EBS에서 방송한 것들이다. 나도 이 두 강연은 EBS가 아닌 유튜브에서 전편을 다 보고 깊은 깨달음을 얻은 바 있다. ㅎㅎ

이번 까미노의 주제는 딜리트다. 그것도 빨리 딜리트를 배우고 이 책도 배낭에서 딜리트시키는 것이다. 첫날에 반 넘게 읽었다. 이 책도 딜리트될 날이 얼마 안 남았다.

딜리트는 원근법을 없앤 피카소의 그림에서도, 날개니 종이 주머니를 없앤 다이슨의 제품에서도,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스티브 잡스의 애플 제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사업을 추진할 때 만드는 최소한의 기능만 구현되는 제품이나 서비스인 MVP(Minimum Viable Product, 최소기능제품)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내가 앞으로 경영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도 필수적인 원칙이 될 것 같다.

업무를 단순화해야 집중할 수 있고 그 몰입이 창조적인 성과를 더 만들어 낸다. 작년 12월 딜리트를 몸소 체험하고 그 이후 업무성과가 더 나오는 걸 보면 딜리트는 나에겐 너무나 고마운 개념이다. 스티브 잡스가 인도를 다녀온 후 달라진 것처럼 나도 산티아고를 다녀온 후 달라져가고 있는 건가? ㅎ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레온 어느 알베르게에서 밤은 깊어간다. 본격적으로 걷는 내일이 기대된다.

2019.02.24. 03:23에 레온 샌프란시스코 알베르게에서 쓰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