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Another First Day

2019.02.24. Day 22

by 메추리

24 Another First Day
2019.02.24. Day 22

오늘은 실제로 걷는 첫날이다. 비록 이전에 두 번 왔고 600킬로가 넘게 걸었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새로운 첫째 날이다. 초보자이기에 나를 낮추고 더 겸손하게 걸어야 한다.

5:54에 눈이 떠졌다. 아차 그건 아니지. 고맙게도 시차 부적응으로 2시에 일어나서 첫 순례기를 완성했다. 잠시 눈을 더 붙인 다음 일어난 시각이 6시 무렵이다. 전날 사둔 바나나 3개와 하몽을 모두 비운다. 순례길 첫날에 항상 부실한 아침으로 고생한 적이 많았거든. 이렇게 많이 먹으면 아무리 걸어도 살이 안 빠질 텐데 걱정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똥 한판 때림.

6인실 알베르게에 유일하게 같이 있는 노르웨이에서 온 머티어스가 따뜻한 커피를 가져온다. 인정 많은 아저씨다. 57세라고 하는데 이태리 여친이랑 잘 지낸다고 한다. 그 나이에 여친얘기를 툭툭 던질 수 있는 문화가 정말 아주 살짝 부럽긴 했다. ㅎㅎ

6:46 출발. 지금 영상 1도인데 그리 춥지 않다. 넘 많이 껴 입었나? ㅎㅎ 오다 보니 여기 온도계는 7도라 나온다. 구글이 잘못 나온 건가? 조금 더 걸으니 구글이 맞는 것 같다. 코 끝이 아린다. 목 폴라를 더 올려 쓴다.

청소차. 새벽부터 바삐 움직인다. 세상은 바삐 움직이는 분들로 인해 별 탈 없이 돌아가는 듯하다.

7:15 갈림길에서 주춤하다. 산티아고 방향과 오비에도 방향이 나온다. 아이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해 본다. 그리고 그제야 하늘의 달과 별을 본다. 좋다.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7:30 손이 넘 시려 주머니에 넣고 걷다. 아무리 추워도 이 새벽 추위는 1시간 이면 없어질 것이다. Just One-Hour Cold!

육교 같은 구름다리가 나타난다. 화살표 방향 표시가 없어 헤멜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친절히 카미노를 알려주는 분들. 그 넉넉한 마음씨에 감사드린다.

참 전날 미사 얘기도 잠깐 해야겠다. 내가 묶었던 숙소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숙소라 신부님도 상주해 계신다. 페데리코라는 신부님께서 7:30 미사에 오라고 하셔서 미사도 참가했다. 미사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축복을 해주셨다. 미사 후 식당에서도 마주쳤는데 따로 머리에 손을 올리시며 성호도 이마에 그어 주시며 축복기도도 해주셨다. 그리고 카미노(순례길)를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달라고 당부해 주셨다. ㅎㅎ 이건 내 스스로 잘하고 있었던 것인데.

7:56 도시를 벗어나다. 이제서야 뒤돌아본다. 태양이 떠오르며 온통 주황이 서서히 붉음으로 바뀌어간다. 아름답다.

8:35분 거의 9킬로 걸은 지점에서 지팡이로 쓸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적당한 길이로 중간을 잘라내고 가시를 다듬으니 제법 지팡이답다. 이런 지팡이를 순례길 걷는 초입에서 발견할 수 있어 다행이다.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얘는 이름을 부엔(Buen)으로 하였다. 첫번째 함께 했던 지팡이가 ‘까미’, 두번째가 ‘미노’였으니 세번째 ‘부엔’까지 합치니 3부작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완성이다. 넘 갖다 붙였나? ㅋㅋ 처음부터 기획된 3부작이 있었던 것처럼. ㅎ 원래 세상이 그런 거다. ㅎㅎ

부엔 까미노는 영어로는 ‘Good Way’ 정도로 순례길 걸으며 주고 받는 인사라고 보면 된다.

부엔이라 같이 걸으니 좋다. 10.35킬로 온 지점에서 애플워치 보다 발목 삘 뻔했다. 다시 조심, 겸손.

9:40까지 13.4킬로를 걷다. 첫 빠를 발견하고 커피와 오렌지를 하나 먹다. 1.25유로. 착하다. 오렌지의 상큼한 맛이 입맛을 돗군다. 물론 오줌도 한판 하고.

까페 앞 종탑에 백조가 앉아 있다. 둥지도 만들고 오래된 종탑 분위기와 제법 어우러진다. 아 둥지냉면 먹고파.

10:12 출발. 그리고 여기 와서 걷는 중 첫 순례자 한 명 발견했다. 따라가는 건 언제나 편하다. 노란 화살표를 찾는 신경이 훨 덜 써지거든. 그라찌아에서 온 친구인데 첫 시작 지점인 생장에선 눈 1미터나 와서 넘 힘들었다고 하네. 거기에 비하면 난 너무나 편한 첫날 일정이 아닌가?

10:45에 길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구글맵에 의지해서 걷다. 사실 선글라스를 끼니 표지판이 잘 안 보인다. 길 잃어 정신없는 지금 이순간. ‘지킬과 하이드’ 뮤지컬 곡 ‘지금 이순간’을 듣는다. 앞으로 넓게 펼쳐진 벌판. 두려움이 없다. 그냥 나아가면 될 뿐. 비록 버려지고 저주당해도 난 희망을 품고 절실하게 나아가면 된다.

쌩쌩 달리는 도로변을 40분 가까이 걷는다. 갈림길에서 망설이는데 개 데리고 산책 나온 분이 자기 따라오라고 알려주신다. 휴우 다행이다. 그러다 발견한 화살표. 또 얼마나 기쁘던지.

11:46 까페 발견. 21.47킬로. 29,187걸음. 뿔뽀(문어) 달라고 했더니 없단다. 그래서 추천해 달랬더니 피시가 좋단다. 와우 큰 가자미 한 마리와 맥주가 10유로라니. 언빌리버블. 넘 신선하고 부드러운 질감에 가끔 전해지는 소금의 진한 짠맛이 역대 최고 가자미 요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광어인가? 왼손 오른손. 광어는 두 글자니 왼손, 도다리는 세 글자니 오른손. 이게 뭔 줄 아시는가? 광어는 손등을 위로 했을 때 왼손에서 엄지가 가리키는 방향에 눈이 있고, 도다리는 오른손의 엄지 방향에 눈이 있다는 거다. 광어와 도다리 판별법이다. ㅎㅎ

새끼발가락 물집이 잡혀 밴드 하나 투척한다. 12:37 맥주 두 잔 하고 자리를 뜨다. 아직 13킬로 남았다니. 쩝 쩝.

기온 18도인데 넘나 뜨거운 햇살에 나도 모르게 ‘에이 18’이 나온다. 넘 힘들다. 머리도 핑 돈다. 맥주 때문인가.

2:03 28.12킬로를 와 산마르틴에 도착. 발바닥부터 오금, 고관절이 다 아프다. 흑. 아직도 7.2킬로 남았는디. 갈증나 까페서 얼음 동동 콜라를 먹다. 꿀맛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오후 2시의 태양 속으로 들어간다.

끊임없이 펼쳐진 도로 옆 직진 길. 작렬하는 태양까지 나를 더 힘들게 한다. 왼쪽 무릎 뒤쪽 통증이 심해진다. 오금이 저려온다. 이런 경우는 순례길 역사상 처음이다. 첫 순례자를 만난 이후 더 이상 순례자도 안 보인다. 매번 응원해주시는 애경누님의 위로가 필요하다. 내가 왜 다시 걷는지 모르겠다. 이게 뭐라고.

산티아고 세번째 온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오늘이 실제 걷는 첫날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난 처음 걷는 애송이와 다를 바 없다. 내 다리 근육, 어깨 근육이 아직 적응도 되지 않았고 배낭의 무게를 지탱하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It’s another first day on camino.

그래. 오늘이 또 다른 새로운 첫째 날이지. 그러니 서툴 수밖에 없어. 나를 낮추고 나를 비울 수밖에 없지. 읽고 있는 Delete의 철학처럼 말이야. 극심한 고통을 당하니 다른 스트레스나 고민이 들어갈 틈이 없어지고, 비우니 새로운 것들이 채워질 수 있게 되는 거고.

뭐든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오판이 나오고 익숙한 일에서 큰 실수가 나오는 법이거든. 과거의 익숙함에서 나를 격리시켜 무슨 일을 하든 이건 또 하나의 새로운 것이고, 그걸 하는 첫째 날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에고고 현실은 지금 다리도 아프고 배낭도 넘 무겁다는 거다. 오늘 알베르게에 가면 기필코 책 ‘딜리트’를 딜리트시킬 거다. 책 무게 620그램이라도 언능 줄이고 싶다.

처벅 처벅 걷는다. 정면에서 비추는 태양이 눈도 괴롭힌다. 그리고 4:15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35.3킬로. 49,940걸음.

2019.02.25. 오전 3:55에 침대에 누워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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