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6. Day 24
26 Intuition
2019.02.26. Day 24
오늘은 역대급 날이다. 원래 가는 코스도 어제 중도에 포기하고 다 못 간 거리도 있어 36킬로 가까이 되고, 오르막 내리막 경사도 극심하기 때문이다.
6:20에 기상하여 참치캔, 삶은 계란과 귤 두개로 아침을 해결하다. 방에 자는 분들이 있어 화장실 옆 의자에서 먹고 있는데 뭐 장소가 그래도 맛만 있다. 그리고 안 먹으면 못 걷는다.
7:22 같이 머물렀던 이태리 친구랑 출발한다. ‘아고’라는 이 친구가 오레오를 건네준다. 달다. 오늘 저녁땐 꼭 오레오를 살 거다.
그리고 걷는다. 30분쯤 지나 뒤를 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먼동이다. 셋째 날이다.
아직은 아고가 보인다. 절뚝거리지 않고 제대로 걷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가?
목폴라로 코와 귀를 덮는다. 지팡이를 옆구리에 끼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다. 넘 춥다. 1도. 해뜨기 직전이 제일 춥다고 했던가?
8:23 5.33킬로를 걷고 잠시 쉬다. 아고가 무릎이 아프다고 해서 파스를 하나 줬다. 17일 일정으로 산티아고 까지 간다고 한다. Oh My God! 보통 32일 정도 걸리는 거리를 17일에? 피레네 산맥 눈길도 헤치고 온 대단한 젊은이 이긴 한데. 파스에 대한 보답으로 프로틴 바도 하나 선물로 준다. 먼저 출발하는 친구에게 행운을 빈다. 8:33 다시 절뚝거리며 출발한다.
이렇게 추우니 지금은 태양이 그립다. ㅎㅎ 빨리 그 열기를 뿜어주기를.
도로 옆 길을 걷다. 살짝 오르막 길에서 뒤에 떠오르는 태양으로 인해 그림자가 비친다. 내 그림자.
9:50 11.65킬로를 와서 잠시 쉬다. 평온. 과일 말린 거를 먹다. 시큼한 맛이 올라온다.
11:16 16.84킬로. 잠깐 쉬다. 힘들다. 21킬로 남았다. 갈 수 있을까? 점심 먹을 만하린(Manjarin)까지 이제 5.7킬로. 계속 혼자 걷지만 조금만 더 힘내자.
11:50 폰세바돈(Foncebadon)에서 바 하나 발견하다. 여기서 일단 점심하기로 했다. 18.46킬로를 오다. 하몽 샌드위치와 맥주 한잔 하고 길을 떠나려는데 어제 같이 걸었던 한국인 친구를 다시 만나다. 오늘 목적지와 숙소 얘기를 하고 먼저 일어났다. 어차피 이 친구에게 곧 따라 잡힐 거다.
2:15 25.8킬로 와서 잠시 쉬다. 대박 빡쎈 언덕이다.
이제부턴 계속 자갈로 된 내리막길이다. 무릎에 압박이 온다. 까딱하면 발 삔다. 발바닥도 아프다. 그래도 많이 왔다. 3:03 29.89킬로. 잠깐 쉬다 가자.
4:15 35.7킬로 와서 잠시 쉬다. 아직도 5킬로다. 흑.
레몬 맥주가 먹고 싶다. 지루한 내리막 돌길은 계속 이어진다. 큰 계곡 옆 아슬아슬 낭떠러지 난간 길이 나온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바로 떨어지는 길이다. 조금만 더 힘내자.
5:20분부터 마을이 보인다. 이상하게 알베르게 검색이 안된다. 뭔가 불안이 엄습한다.
이런 예감은 항상 틀림이 없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오늘은 여기 호텔에 묶어야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를 이끌고 천천히 걸어주며 함께 온 친구가 조금만 더 가면 알베르게가 있다는 것이다. 그 고마움과 의리를 생각해 조금 더 걷는다. 한 곳은 문 닫았고 조금 더 가니 공립 알베르게가 있다. 그리고 그 친구와 헤어졌다. 그 친구는 7킬로를 더 가서 다른 마을에 머문단다.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걸어올 수 있었는데. 참으로 고맙다.
알베르게는 아무리 두드려도 답이 없다. 전화하라고 메모가 남겨져 있어 전화를 거니 왠지 내 폰에서는 전화가 가지 않는다. 뭐 내가 유럽 유심으로 유럽서 전화해본 적이 없어서리.
우여곡절 끝에 동네 어느 중학생 정도 보이는 학생에게 부탁하여 알베르게 관리인이 있는 집에 갔었고, 그 관리인이 짐 풀고 있음 곧 온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오다. 그것도 무거운 배낭을 메고. 물도 다 떨어졌다. 수돗물을 받아 바로 두병을 먹었다. 그리고 짐을 풀려고 하는데 너무나도 춥다. 어느 온기도 안 느껴진다. 온수도 안 나온다. 이것도 운명인가? 맘은 일단 정했고 뭐라도 먹어야 될 것 같아 다시 시내 방향으로 걷는다. 그 와중에 아고를 만나다. 오 신이시어 이렇게 도와주시다니. 알베르게 어떻냐고 묻길래 완전 테러블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그랬더니 자기는 시내에 있는 40유로 하는 라울 호텔에 머문다고 하기에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Intuition(직관)이 발동했을 때 따라야 한다. 논리적인 설명이 부족할 수 있지만 직관도 때론 완벽한 논리가 된다. 스티브 잡스도 긴 인도 여행을 통해 논리 중심의 서구사회와 완전 배치되는 직관의 중요성을 깨닫지 않았던가? 우리가 아이폰, 아이패드 등을 사는 게 다 논리 만으로 설명되나? 그냥 이뻐서 사는 경우가 많다. 스티브 잡스의 직관에 대한 철학은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통해 제품에 적용된다. 극도로 단순함을 추구하다 보니 제품 자체가 아름답고, 직관의 힘을 믿으니 설명서 조차 없다.
몰리나세카(Molinaseca)에 있는 알베르게에 5:40에 도착했지만 직관을 무시한 대가로 헤매느라 7:10에서야 호텔에 도착하다. 그 대가가 참으로 가혹했지만. 45.15킬로 64,216 걸음.
샤워 마치고 레몬 맥주 원샷하다. 순례자 메뉴로 나온 풍성한 샐러드와 스테이크로 배를 채우다.
2019.02.27. 06:53에 따뜻한 호텔 침대에 누워 편하게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