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7. Day 25
27 Holy Simplicity
2019.02.27. Day 25
어제는 8:30에 그냥 뻗었다. 이빨도 닦지 않고 말이다. 내 몸상태 짐작 가시지?
만약에 어제 홀로 냉기 가득한 공립 알베르게에서 찬물로 샤워하고 잤다면 난 지금 아마 이 순례기를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아고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근데, 이 친구 17일 일정으로 산티아고 갈 수 있는 것 맞아? 어제 묵은 몰리나세카 마을도 나 보다 늦게 도착했는데. ㅎㅎ
오늘은 8:10 출발. 아침은 하몽 올린 바게트 빵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 해결하다. 똥도 잘 안 나와 요구르트 2개와 우유도 먹었다. 커피머신이 작동 안 한 건 큰 아쉬움이었지만 호텔이 주는 안락함이 역시 좋다. 그렇다고 순례자가 고급 호텔에 묵은 건 아니니 오해 마시라. 작은 시골에 있는 모텔 수준이라 보면 된다.
9:31 6.64킬로를 와서 뽄페라다 마을 길가에서 첫 휴식을 취하다. 사과 하나 물 한 잔. 우띠 커피 넘 먹고파. 춥다. 아직도 26킬로 씩이나 남았다. 어쩔?
11:01 12.35킬로를 와서 잠시 쉬며 쉬도 하다. 여기서도 사과 하나 물 한 잔.
11:58 원래 가려던 마을인 깜뽀나라야 전에 있는 마을에서 그만 맥주의 유혹에 넘어가다. 그래 여기서 한잔 하고 가자. 누가 쫒아오는 것도 아닌데. 15.55 킬로 옴. 거의 절반을 왔다. 아자. 맥주와 하몽 곁들인 오믈렛을 먹다. 바로 해서 따뜻하니 맛난다. 양이 좀 적어서 아쉽지만. 그래서 아침에 못 먹은 에스프레소와 도넛을 더 시켰다. ㅎㅎ
거룩한 단숨함이란 뭘까? Holy Simplicity. 어제 직관이란 내용으로 순례기를 썼더니 애경 누님이 거룩한 단순함으로 답을 주셨다. 이게 뭔지 계속 고민하면서 걸어야겠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 까진 절뚝거리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제대로 걷는다. 신기하다. 쉬는 동안 뭉쳐진 근육이 다시 동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듯하다. 마치 유주얼 서스펙트의 주인공 케빈 스페이시의 연기처럼. ㅎㅎ
순례자는 단순하다. 길을 따라 걷고 먹을 것과 하루 쉴 잠잘 곳을 찾는다. 단순한 삶을 살기에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단순함은 문제의 본질을 빠르게 인식하게 하고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어떻게 보면 ‘Why’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 왜 사냐고 묻는데 그 답이 어쩌고 저쩌고 구구절절 풀어놓으면 그 사람은 인생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고 정리도 되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진리는 단순하다.
함께 걷는 순례자들 없이 하루 8시간씩 걷기만 하면 처음엔 무릎 걱정, 물집의 고통, 태양과의 사투, 갈증 등으로 괴롭고 정신없이 바쁘다. 그런데 그게 하루 이틀 지나고 몸에 익숙해지면 자연도 보이고 나에 대해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고 하루 종일 걸으며 그 질문에 답을 찾고자 노력하게 된다. 다른 걱정 없이 하나의 질문에 답을 찾으려 노력하면 아무리 풀기 어려운 문제라도 답 근처에는 갈 수 있는 듯하다. 마치 Delete의 철학처럼.
물론 단순함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물집이 터지고, 발바닥이 벗겨지고, 근육이 뭉쳐지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래서 수도자들이 금식하고, 묵언 수행하는 등 의도적인 고통을 가하며 일상을 단순화하는 것이 아닐까? 가장 단순해야 인간의 존재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고 그래야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이런 경지가 ‘Holy Simplicity’가 아닐까?
바람. 바람. 또 바람. 모자를 부여잡고 걷는다. 1:34 홀로 걷는 순례자 한 명을 발견하다. 이내 내 발걸음도 빨라진다.
천천히 걷는 걸로 봐서 다리에 문제 있겠거니 싶었는데 역시나 다리가 아프다는 친구. 아일랜드에서 온 마이클이란 친구인데 오늘 나랑 같은 비야 프랑카(Villafranca)에서 머문단다. 조심히 잘 와서 또 만날 수 있기를.
2:16 빠에 들리다. 당연 레몬 맥주다. 시큼하면서 달콤하다. 행복을 느끼다. 23.79킬로를 오다. 이제 10킬로 정도 남다. 두 시간 빡쎄게 가자.
3:57 오늘 목적지 비야프랑카를 3.3킬로 앞두고 벚꽃 나무 아래서 잠시 쉬다. 넙적한 돌멩이 위에 앉으려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지다. ㅎㅎ 다리 힘이 풀려서리.
2년 전 함께 다녀온 산티아고 친구들 단톡방에 내 브런치 글 캡처가 올라왔다. 경로 녀석. ㅎㅎ 지금 이 순간 경로가 부르는 ‘지금 이 순간’이 듣고 싶다. 선경이의 알베르게 바닥 피자 사건도 생각나고, 영신이의 ‘꺼억 꺼억’ 호탕한 웃음소리도 떠오르네. 용현이의 구수한 닭백숙도 먹고 싶고. 아영이의 어깨 안마도 좋았고. 근데 진우의 고프로는 어디 간겨? ㅋㅋ
처벅처벅 비야프랑카를 향해 걷는다. 오후 4:39의 햇살은 따스한 것이 딱 좋다.
그렇게 걸어 4:55 시내 플라자 호텔에 도착하다. 왜 알베르게에 안 갔냐고? 너도 한번 걸어봐라. 편한 곳에 쉬고 싶지. ㅎㅎ 오늘 33.48킬로 걸었다.
호텔 문이 안 열려있어 인터폰으로 연락하고 영어로 몇 마디 했는데 과연 주인이 올지. 일단 기다려보자. 하도 안 와서 다시 인터폰으로 연락하니 2분만 기다려달란다. 비수기라 확실히 숙소 잡기 어렵다. 호텔도 프런트에 사람이 없으니. 쩝!
45유로 호텔에 세탁 서비스까지 맡기니 10유로가 더 든다. 뭐 이 정도는 써야지.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호텔 앞에 마이클이 있는 게 아닌가? 역시 또 만나는 군. 이 친구는 나보다 1시간 늦게 도착한 터였다. 오늘은 편히 쉬고 싶어 호텔로 왔단다. 나와 같은 심정일 거다. 요 앞 레스토랑에 있을 테니 나와서 함께 술 한잔 하자고 했다.
여기 와서 처음 시킨 뿔뽀. 한입 먹어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역시 뿔뽀는 진리다. 레몬 맥주가 계속 들어간다.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 넷째 날도 저물어 간다.
2019.02.27. 오후 9:57에 침대에 누워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