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8. Day 26
28 Ultreia
2019.02.28. Day 26
Ultreia(울트레이야, 계속 걷다)
6:50에 일어났다. 평소와 다르게 더 자고 싶었지만 오늘도 순례자에겐 갈 길이 있어 십분 동안 뒹구는 걸로 만족했다.
아침으로 캔 참치, 요구르트, 바나나, 오렌지를 먹고 출발한다. 8:03 오늘은 29킬로 밖에(?) 안 가니 조금 여유를 가지고 가자. 숙소도 예약해 두었으니 더욱더. ㅎㅎ
처음부터 나오는 도로변 언덕. 아침에 먹은 참치가 올라온다. 흑. 그 냄새 아시지? 참치 기름 자르르 흐르는 그런 것. 제기랄, 괜히 참치 먹었나? 무게 줄일 겸 해치웠는데.
계곡 사이 음지길을 시작부터 계속 걷고 있다. 넘 춥다. 부엔이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 모두 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한 시간 40분이 지난 9:47에서야 드디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다. 햇살아 왜 이리 그립노. 그리고 잠시 쉬다. 8.12킬로를 왔구먼. 해가 떴는데도 2도다. 흑.
11시 무렵 길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가 타고 가던 자전거를 멈추고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순례길 중 처음 만난 아시아인이라 기뻐라 한다. 그렇게 한 시간을 얘기하며 같이 걷다. 그리고, 11:51 15.37킬로 걷고 빠에 도착하다. 이름이 유토인 이 친구는 작년에 대학 졸업하고 올해 4월부터 일하는데 친구가 산티아고 추천해 줬다고 왔다네. 자전거 타고 레온에서 싸리아까지 가고 그다음부터는 걷는다는 군.
같이 점심 먹으며 유토에게 왜 걷는지 의미를 찾으며 걸으라 얘기해 주었다. ‘Why am I walking?’을 자신에게 계속 질문하다 보면 답이 떠오를 거다. 그래야 남는 것도 있다고. 서로 라인 메신저도 트고 사진도 찍었다. 아직 돈 벌기 전 상태라 내가 점심을 사주었더니 무지 좋아한다. 산티아고는 다 베푸는 거다. 내가 받은 만큼 말이다. 아니 그것보다 더 베풀어야 한다. 오늘 무사히 싸리아까지 도착하시길. 도쿄 출장 가면 한번 연락해야겠다. 12:42에 자리를 뜨다. 15킬로 남았다.
1:55 20.96킬로를 와서 잠시 쉬다. 점심 이후 몹시 힘들다. 태양도 그렇게 뜨겁지 않은데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완전 지친다. 흑흑. 그래도 순례자는 걸어야 한다. 그게 운명이다. 빠 앞에 나무와 칼싸움 놀이하는 꼬마 여자애가 보인다.
오르고 오르고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 아스팔트 길. 지루한 이 길이 끝나나 싶으니 산길로 들어가 다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에고 지친다. 3:20 물 한잔 하며 잠시 쉬다. 귤껍질이 있는 거 보니 어느 순례자도 여기서 쉬었구나 ㅎㅎ
여기 길은 흡사 제일 어렵다는 피레네 산맥을 넘는 쌩장-론쎄스바예스 코스와 유사하다. 피레네 산맥 코스는 해발 170미터부터 1,450미터까지 21킬로를 올라간다면 오늘 코스는 해발 505미터부터 1,330미터까지 올라간다. 특히 트라바델로(Trabadelo)부터 아스팔트 길로 9킬로, 산길로 9킬로, 합이 18킬로를 올라만 간다. 오르막은 오늘 목적지인 오세브레이로(O Cebreiro)에서 끝난다.
‘세브레이로’로 이름 지은 이유도 전라도 사투리로 완전 ‘쎄브러’여서 아닐까? 근데 이것 만으로 부족해서 ‘오 쎄브러’로 ‘오’가 붙은 게 아닐까? ㅋ
울트레이야 울트레이야. 자꾸만 올라간다. 계속 걷는다. 계속. 이렇게 걸어가면 신과 가까워지는 걸까? 신께서 도와주실 건가?
Ultreia Ultreia Esuseia,
Deus, Adju Vas Nos
(계속 걷고 계속 걷고 성장하고,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거다)
- 라틴어로 된 산티아고 순례자들을 위한 노래
언덕에서 잠시 쉬다. 4:37 29.56킬로를 오다. 아직도 2.3킬로나 남았다니. 헉.
소똥 냄새가 진동한다. 푸른 초원이 계속 있는 걸 보니 근처에 소나 말이 많이 있을 듯하다. 고향의 냄새이긴 한데 지금은 지쳐 정신이 없어 그저 냄새가 좋지 않게만 느껴진다.
가도 가도 언덕만 있다. 저 코너를 돌면 마을이 보일 거야. 아니네. 저 언덕만 넘으면 정말 보일 거야. 또 아니네. 이러기를 몇 번. 휴우.
5:30 언덕 끝에 도로가 보인다. 그리고 오세브레이로에 무사히 도착하다. 32.29킬로 48,427걸음. 이제 씻자.
땀에 찌든 순례자의 몰골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후 마을 산책을 하다. 바로 앞 오래된 성당이 있어 들어가 십자가 정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여기까지 무사히 오게 하심에 감사를, 나를 더 낮추게 하심에 감사를, 여러 도움의 손길 주심에 감사를.
기도를 마치고 성당 벽을 보며 나오려는데 각 국 언어로 번역된 성경책이 수십 권이 전시되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한글 성경도 있길래 보니 ‘마태복음 6장 16절’이 바로 눈에 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장 16-18)
순례길 걸으며 순례자 코스프레 차원에서 수염도 깍지 않고 꾀죄죄한 모습에, 가리비 조개 배낭에 붙이고 목걸이도 하고 다녔는데. 이게 모두 남에게 보이려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럴수록 좀 더 깔끔하게 다니고 은밀하게 해야 되었는데 말이다.
울트레이야. 울트레이야. 계속 정진해야 된다. 난 아직도 갈 길이 멀다.
2019.02.28. 오후 10:21 오세브레이로 어느 후진 호텔 침대에 누워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