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1. Day 27
29 Going Down
2019.03.01. Day 27
6:40 눈이 떠지다. 마지막 날. 발가락 물집만 조금 신경 쓰일 뿐 다리 근육은 괜찮은 편이다.
초코 크로와상을 먹는다. 칼로리가 무려 425kcal이다. 그래도 순례자는 먹어야 걸을 수 있다.
호텔에 캔맥주, 내 다리를 푸는데 도와주었던 스틱형 파스 등을 다 버렸다. 배낭도 가볍게 발걸음도 가볍게 호텔을 나선다.
택시 기다리며 에스프레소 한잔하다. 그리고 8:15 트리아카스텔라로 출발한다. 고지대라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답다. 이걸 걸어 올라왔다니 뿌듯함을 느끼는 동시에 택시로 편하게 내려간다니 죄책감도 느낀다. 몸은 편하게 마음은 죄스럽게.
어느 순례자 가이드를 보아도 오세브레이로에서 싸리아(Sarria)까지는 이틀 코스로 되어 있다. 지도상 44킬로이니 실제는 50킬로가 넘을 거다. 사십 대 후반 저질 체력으로는 아무래도 무리다. 택시는 이런 현실 자각을 바탕으로 한다. 순례자도 담주 월요일 출근해야 된다. 이해 바란다. 그렇게 내려간다 속세로.
인생도 길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이젠 내려가야지 아래로, 그리고 현실 속으로. 많이 버리고 삭제하고 비웠잖아. 차곡차곡 채워가자고. 인생 기니.
8:37 트리아까스텔라에 도착하다. 22분 걸렸다. 19킬로를 걸어왔다면 족히 4시간은 걸렸을 터. 사진 몇 장 찍고 싸리아로 걸어간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참 좋다. 태양은 산에 가려있지만 그리 춥지는 않다. 이번 순례길 일정을 정신적으로 함께 한 애경 누님을 위한 헌정곡 하나 부른다. Ultreia(울트레이야).
9:47 물소리가 좋은 개울가에서 잠시 쉬다. 5.5킬로를 걸어오다.
고요한 시골길 자연을 만끽하며 걷는다. 나뭇가지도 치우고 한층 여유를 가지고 말이다. 역시나 아침에 택시 타길 잘했다. 마지막 날은 이런 게 필요하지.
참, 이번 순례길은 평소 신던 나이키 운동화로 걷는다. 같이 걷던 모든 순례자들이 내 신발 보고 놀란다. ㅎㅎ 등산화는 지난번 두 번째 순례길 마치고 마드리드에서 버렸거든. 새로 사기도 그렇고, 무겁고 딱딱한 등산화는 이제 질색이거든. 그래도 이 운동화로 잘 버텼다. 하늘이 도와주고 비도 안와 운동화로도 무사히 올 수 있었다.
11:10 네모진 성당이 아름다운 사모스(Samos)에 도착하다. 도착 직전 깔딱고개는 방심을 하지 못하게 한다. 어느 길이나 쉬운 길은 없다. 10.8킬로를 오다. ‘Ham & Egg’에 레몬 맥주 한잔 하다.
12:52 또 하나 언덕 높은 마을에 오르고 잠시 쉬다. 14.53킬로를 왔군.
내가 부른 ‘Ultreia’를 페북에 올렸더니 애경누님이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코멘트 남겨주셨다. 그런가? 흑. 감사.
1:56 잠시 쉬다. 19.22킬로. 아직도 7.1킬로 남았군. 만만치 않어. 조금 있으니 고등학생 순례자 한 무리가 요란스럽게 지나간다. 여학생들 틈에서 BTS의 ‘아이돌’이 흘러나온다. ‘Yeh BTS!’라고 하니 맞장구를 쳐준다. 역시 BTS. 스페인 시골길에서 듣게 되다니.
새끼발가락 물집이 많이 아파 양말까지 벗고 쉬고 있다. 밴드를 다시 붙여야 할까? 아서라 잘 안 띄어진다. 그냥 가자. 사과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다시 걷는다.
3:00 잠시 쉬다. 22.54킬로를 오다. 남은 거리 4.3킬로. 세 번에 걸쳐 온 까미노의 마지막 길이다. 아껴서 걸어야 되는데 새끼발가락이 영 도움을 안 준다.
태양이 구름 속에서 오락가락한다. 그리고 난 선글라스를 벗을까 말까 고민한다.
처벅처벅 걸어 언덕에 올라오니 저 멀리 싸리아가 보인다. 조금 더 걷다 싸리아 표지판 보고 잠시 쉬다. 이제 다 왔다. 흑.
4:20에 오늘 점심 먹으며 예약한 알베르게에 도착하다. 계획이 바뀐 거냐구? 그건 아니고 좀 씻고 기차를 타야 하지 않겠나? 이 순례자도 문명인이다. ㅎㅎ 마지막 날 27.19킬로를 걷다. 그리고 지난 두 번과 합해 800킬로 순례길 완성하다.
큰 감동이 올 줄 알았다. 전혀 그런 게 없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다. 한국 돌아가면 다시 그리워지겠지. 지금은 빨리 샤워하고 밥 먹을 생각 밖엔 나지 않는다. 뭐 큰 메시지를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ㅎ
샤워를 하고 강변을 따라 산책하다. 배낭을 벗으면 오히려 더 쩔뚝거린다. 삶이 주던 무게감이 없어서인가? 이상하게 짐이 없음 더 그런다.
오후 6시에 ‘Cafeteria Santiago’라는 식당에 들어오다. 내 순례 일정을 마치기에 딱 좋은 곳일 게다.
온몸이 쑤신다. 정확히는 온몸은 아니고 온 하체만 쑤신다. 고관절, 허벅지, 종아리, 발바닥.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아님 와인 때문일까? 그것도 아님 싸리아오는데 몸 사리다가 몸살이 난 건가? ㅋ
뽈뽀도 감바스도 양이 좀 적지만 맛은 있었다. 와인도 세 잔째 들어가니 취기가 돈다. 도는 세상 이렇게라도 도니 좋다. ㅎㅎ
어제 만난 Yuto에게서 라인 메시지가 온다. 자기는 포루투마린 잘 도착했단다. Buen Camino. 담엔 도쿄 신주쿠에서 보자구.
알베르게에서 잠시 눈을 붙이다 문 닫는 시간도 있어 밤 10:15에 나왔다. 샤워도 단잠도 허락해준 이 알베르게 고맙다.
10:22 이제는 지팡이 부엔이와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레온 걷는 초입에 발견하여 나의 또 다른 다리가 되어준 부엔이. 흑. 넘 고마워. 다리 위에 올라가 부엔이에게 입맞춤하고 강 아래로 던졌다. 넌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돼. 그리고 역을 행해 걷는다. 부엔이 없이 걷는데 왜 이리 허전한지. 첫 지팡이인 까미 보낼 때도 그랬었는데. 두번째 지팡이 미노를 경로한테 주고 떠날 땐 덜했고. 흑 슬프다.
오후 10:43 기차역 도착하다. 기차는 0:22에 떠나는데 뭐 하고 있을 꼬. 조수미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나 들어야겠다.
2019.03.01. 11:06 마드리드행 야간열차를 기다리며 싸리아 기차역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