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내 앞에 놓여진

2015.10.25. Day 37

by 메추리

39 내 앞에 놓여진 길

2015.10.25. Day 37

오늘은 발이 아닌 버스로 이동한다. 짐도 호텔에 맡겨두어 몸도 가볍다. 스페인 땅끝마을 피스테라로 가는 버스도 바로 호텔 앞에서 출발한다. 순례길 도중 만난 몇몇 순례자들이 보인다. 그들도 땅끝마을은 버스로 가고 싶은 것 같다.

산티아고를 빠져나왔다. 창밖으로 멋진 풍경이 이어진다. 아름다운 해변 마을 묵시아에서 잠시 머문다.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다.

잠시 머문 묵시아를 뒤로하고 피스테라로 버스는 달린다. 강렬한 태양과 푸른 바다가 이어진다. 버스는 멈췄다. 시간도 멈춘 듯. 여기가 땅끝 피스테라다. 스페인어로 Fisterra는 끝을 뜻하는 Fis와 땅을 뜻하는 Terra의 합성어다. 우리나라도 땅끝마을을 토말(土末)이라 한다. 다들 비슷하다. 스페인에선 좀 더 스페인 답게 Finisterra라 부르기도 한다.

버스에 내려 땅끝으로 향한다. 순례의 종착지를 뜻하는 0.00km 표지석이 보인다. 종착지면서 길의 시작이다. 그곳을 지나쳐 지나가는데 뒤에서 'There is the end of earth in England, too'라고 얘기하는 게 들린다. 그래, 다들 각기 자기 나라만의 땅끝은 있겠지. 그리고 그 끝이 시작일 거고.

바다를 보고 더 가까이 내려간다. 순례자들이 이곳에 이르러 새 출발을 다짐하며 순례길을 함께 해온 신발을 태운다던데 곳곳에 태운 흔적이 보인다. 나도 태울까? 아서라 슬리퍼밖에 없다.

바위에 앉았다. 그리고, 땅끝에서의 느낌을 시로 써 내려갔다.


땅끝에 서다

0km
그 표지석이 있는
땅끝에 서다

눈부신 태양과
푸른 하늘
바다에 반사된 은빛 출렁임과
하아얀 파도

잠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긴다
꼭 그래야 되는 분위기다
적어도 여기에선

마치 이곳에선
땅뿐만 아니라
시간도 멈추는 것 같다

걸었던 신발을 태우고
다시 걸음을 시작한다는 바로 이곳
땅끝에 서다
(2015.10.25. 스페인 땅끝 Fisterra에서 씀)


이제 난 '0'에서 다시 시작해 걸어간다. 어느 길로 갈지도 잘 모른다. 언덕도 있을 것이고 내리막길도 있을 것이다. 비도 내릴 것이고 바람도 매섭게 불기도 하겠지. 홀로 걷다 보면 동행자도 생길 것이고 또 그들과 헤어져 혼자가 되기도 할 것이다.

힘들기도 하겠지만 가끔 뭔가를 보여줄 듯한 여명도 볼 것이고, 비 온후 맑은 하늘도 맞이할 것이다. 어두운 밤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도 나를 도와주기도 하겠지. 반짝반짝 빛나는 콤포스텔라처럼.

이젠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리고, 난 길을 계속 갈 것이다. 이것이 산티아고가 나에게 알려준 것이다.

안녕, 산티아고
See you soon.


P.S.

내 발이 되어준 카미와 위로가 되어준 바미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그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카미와 바미는 마지막 머문 호텔 나무책상 위에 고이 올려두고 왔다. 약간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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