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 만은 기억해도 돼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스포 주의)
로봇이 가정에서 널리 쓰이고 버려지는 미래 세상. 주인들 돕기 위해 개발된 헬퍼봇 간의 사랑 이야기가 여느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보다 더 애절하게 다가온다. 요즘 핫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얘기다.
버려진 헬퍼봇이 거주하는 아파트, 남성 헬퍼 봇-5(올리버)와 여성 헬퍼 봇-6(클레어)가 옆집에서 살아간다. 신형 헬퍼 봇-6(클레어)가 충전 문제로 올리버를 찾게 되고 이를 계기로 그들은 조금씩 서로를 알아간다.
헬퍼봇-5는 구형이지만 내구성이 강한 반면 헬퍼봇-6는 제조사가 돈벌이에 치중해서 인지 신형임에도 불구 내구성이 떨어진다. 그들이 그려가는, 다소 인공지능에 의해 감정이 제어되어 절제미가 드러나는 사랑 얘기가 잔잔하게 흘러간다.
기계는 오래 쓰면 노후화되고 고장도 난다. 부품도 더 생산되지 않고. 꼭 우리의 신체처럼 말이다. 처음엔 고치면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더 이상 고칠 수도 없다.
사랑이란 감정이 기계와 같을 순 없지만 때론 로봇처럼 절제된 사랑을 하다 불필요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그리고 남겨진 시간에 리셋해서 다시 처음 만난 것처럼 사랑을 키워갈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 인생도 해피엔딩이 아닐까?
중학생 된 딸과 멋진 뮤지컬 데이트를 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온 전미도와 정문성이 나온다고 첫째 딸이 보여 달라고 해서 왔는데 전미도 캐스팅의 공연 티켓은 도저히 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워낙 탄탄한 스토리에 뮤지컬 넘버들이 좋아 정문성, 한재아 캐스팅도 공연에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의 반복적 대사가 주는 친근함(자꾸 보다 보면 그렇게 느껴짐)과 거의 후반부에 나오는 운명을 직감하며 부른 ‘그것 만은 기억해도 돼’ 노래가 기억난다. 그래, 아무리 헤어져야 할, 지워 저야 할 운명일지라도 그것이라고 칭할 만한 것들은 기억을 해야 되겠지.
사춘기 딸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난 이미 구형 헬퍼봇이라 사랑 이란 느낌이 덜하지만 신형인 딸은 좀 더 인공지능이 진화되었을 텐데 ㅋㅋ
2020.08.24. 오후 8:08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