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을 열고 접한 세상
연극 ‘템플’을 보고
- 문을 열고 접한 세상
중년의 홀로 연극보기는 이번 주도 이어진다. 대학로 유니플렉스 3관에서 지난주 ‘늘근 도둑 이야기’를 볼 때 1관에서 연극 템플을 하고 있었는데 무슨 연극인지 몰라 그냥 스쳐지나갔었는데 그 연극을 이번 주에 보게 된 것이다. 지난주에 이 연극을 봤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먼저 밀려온다.
템플은 자폐증 걸린 아이의 성장 이야기다. 자폐증으로 학교에 적응 못하고 문제아로 낙인찍혀가던 아이가 ‘마운틴 컨트리 고등학교’에서 자신의 다름을 인정해주는 선생님을 만나면서 서서히 자신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서처럼 바뀌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하고 자신을 가둔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하는 것과 같이 템플도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발견하고 스스로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애쓴다.
줄탁동시(啐啄同時). 달걀 껍질을 깨고 병아리로 나오기 위해서는 어미 닭이 먼저 밖에서 껍질을 깨서도 안되고 병아리 스스로 부리로 두꺼운 껍질을 쪼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어미가 밖에서 약간의 도움을 줘야 새로운 생명체가 된다.
자폐라는 소위 의학적 소견과 주위의 편견이라는 두터운 껍질도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다름을 스스로 찾고 그것을 깨고 세상으로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건 엄마도 선생님도 해줄 수 없다. 스스로 껍질을 깨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아이가 여린 부리로 껍질을 수없이 쪼아 입이 부르트고 피가 나더라도 밖에서 먼저 쪼아 대선 안된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껍질에 금이 가면(줄: 안에서 쪼는 것) 그때 동시에 탁(밖에서 깨 주는 것) 해야 한다.
템플은 껍질을 깨는 과정을 문으로 표현했다. 그 문을 통과해 나가는 데 있어 방해하는 주위의 시선, 멸시를 극복하고 당당히 스스로 그 문을 통과한다. 그제야 주위에서 자신을 많이 사랑해줬고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폐라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으로 인해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던 템플은 모든 사물을 이미지(그림)로 이해하고 기억해 낸다는 다른 사람들과 다름을 알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간다. 엄마 포옹의 따뜻함이 뭔지 이해를 못하고 불안에 시달리던 아이는 수레를 끄는 소의 심정이 되면서(뭔가 약간의 무게가 느껴지는 그 상황이 감싸주는 느낌으로 이해했나 보다) 그 느낌을 이해하고 동물의 습성과 행동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게 된다. 그리고 동물 관련 연구로 박사도 받게 된다. 현재 미국에서 동물 시설의 1/3이 템플 박사가 설계한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니 그녀의 업적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극은 무용을 적극 활용하여 몸으로 표현하는 감정의 디테일이 살아 있다. 뮤지컬적인 요소는 없지만 몸과 손짓의 섬세한 표현을 통해 절제된 감정을 드러내는데 이게 오히려 더 감성을 자극한다. 서서히 올라오는 감정선은 마지막 템플의 졸업 연설에서 극에 달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샘이 터졌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친다. 여기저기 비슷한 훌쩍임이 들린다.
내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밥 잘 안 먹는다고 소리 지르고, 방 지저분하다고 구박하고, 밤마다 유튜브 보느라 늦게 잔다고 화냈던 내 모습과 중첩된다. 코로나 시대 학교 안 가는 아이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줘야 하는데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구박했으니. 어떻게 보면 내가 현대사회에 찌든 자폐아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템플 박사의 자전전 얘기를 멋진 극으로 옮겼다. 템플 역을 맡은 김주연 배우의 열연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 커튼콜에서 엄마 역을 맡은 배우를 처음 포옹하는데 그것도 극적이었다. 눈물과 박수가 어우러지면서 막은 내려졌다.
다시 보고 싶은데 이번 주 일요일이면 폐막한다. 열흘 남짓 너무나 짧게 공연해서 아쉬웠다. 더군다나 내일은 또 울기 위해 뮤지컬 ‘베르테르’를 보러 가는데. 흑.
난 유독 가을을 많이 탄다. 나이 들면서 울음도 많아진다. 이게 중년 남성의 보편적 모습일까?
오늘 밤은 연극 템플을 생각하며 홀로 대학로서 술로 슬픔을 달래야겠다.
2020.10.09. 오후 8:39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