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목소리를 내자
연극 ‘킹스 스피치’를 보고
- 내 목소리를 내자
때론 연극 자체 보다도 연극이 나오게 된 과정이 더 극적일 때가 있다. 바로 ‘킹스 스피치’가 그런 경우다. 단순히 영화를 연극으로 옮겼겠거니 생각하고 보았는데 연극 본 후 프로그램북을 보니 이 연극까지 오는 데 많은 우연, 인고의 시간 그리고 작가의 집념이 있었다.
영화와 연극의 시나리오 작가는 ‘데이비드 셰이들러(David Seidler)’인데 그의 이야기도 연극 같다. 그 자신이 어린 시절 세계 2차대전을 겪으며 전쟁 트라우마로 말 더듬 증상을 갖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증상으로 고생했고 극복한 ‘조지 6세’의 이야기는 그에게 큰 힘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영웅인 조지 6세의 이야기를 대본으로 쓰기로 결정한다.
작가는 1970년대 조지 6세에 대해 자료 조사 중 왕의 언어치료사 라이오넬의 존재를 알게 되고 수소문 끝에 라이오넬 아들과 연락이 되어 아버지가 예전 조지 6세 치료 시절 진료수첩을 살펴볼 기회를 얻게 된다. 단, 라이오넬 아들의 조건은 사전에 왕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왕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비는 본인 사후에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하고 작가는 왕비가 세상을 떠난 2005년까지 20년을 더 기다렸다. 흑, 20년을 더 기다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대본을 완성하다니.
영화화되는 과정도 스토리다. 시나리오 대본으로 작업하다 아내의 권유로 연극 대본으로 전환한다. 완성된 대본으로 한 극장에서 낭독공연으로 첫 관객을 만났는데 연극으로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데 첫 낭독회에서 감동받은 노부부가 아들에게 대본을 전달하고 싶다고 연락이 온 게 아닌가? 그 아들이 바로 영화 킹스 스피치를 감독한 ‘톰 후퍼’ 였던 것. ㅎㅎ
2010년 영화로 먼저 나오고 2년 후 작가의 소원대로 연극으로 세상에 선 보이게 된다. 그리고 한국으로 넘어와 2020년 12월 내가 연극으로 접한다. ㅎㅎ
나도 2006년 완성한 할렐루야를 작곡한 헨델 이야기인 ‘헨델의 메시아를 위한 작은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7년이 걸렸는데. 메시아를 작곡하게 된 계기와 과정을 풀어가다 나중에 실제 메시아 공연을 하는 과정까지 이어지는 ‘연극+합창’ 형식이었는데 올릴 무대가 없어 계속 까이다 겨우 2013년 부활절에 우리 교회에 올렸는데. 흑흑. 그때의 감동이란. 자신의 스토리가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어 졌을 때 작가 느꼈던 감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연극의 내용은 영화와 동일하다. 왕위 서열 2위인 버티(추후 조지 6세)는 엄격한 왕실 교육과 유모의 학대로 주눅 들어 어려서부터 말 더듬게 되고 결혼해서도 그 증세는 나아지지 않는다. 아버지 조지 5세 사후 형이 왕위를 승계받아야 하는데 유부녀와의 염문, 히틀러에 온화적인 태도, 대영제국 국가들의 반대로 왕이 되지 못하고 동생인 버티가 왕이 된다. 왕이 되기 전부터 연설 시 말 더듬 증상으로 언어치료사 라이오넬로부터 치료를 받아오는데 둘 사이에 위기도 여러 번 겪는다.
“동화책을 읽어 주고 싶어서요”
버티는 말한다. 딸 ‘엘리자베스(추후 엘리자베스 2세, 현 영국 여왕)’에게 더듬지 않고 동화책 읽어 주고 싶은 아버지라고.
상황은 전시로 치닫고 그는 더 이상 아버지로만 머물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유약하고 다소 철없는 형에 대한 불신이 커가면서 처칠을 비롯한 국민들은 새로운 왕을 원한다. 언어치료사 라이오넬도 언어치료사 역할뿐만 어니라 인생 선배로 버티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는다.
“우린 똑같은 배우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이란 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하며 사는 듯합니다”
호주에서 연극하다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이주한 라이오넬이 한 대사는 많은 것을 의미해 준다. 우린 모두 세상이란 무대에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존재일 뿐. 그리고 그 역할에 충실하면 될 뿐. 나도 마찬가지고. 나도 내 무대에서 멋들어진 연기를 하고 있는 거겠지.
“나도 목소리가 있어. 나도 말할 줄 알아. 내 얘기 들어. 나도 권리 있어. 나도 한 사람으로서 내 목소리로 말할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왕위 승계 문제와 더딘 언어치료로 인한 고민, 거기에 라이오넬의 실체가 밝혀지고 라이오넬과 갈등을 겪는 버티가 하는 이 말은 비단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목소리다. 우리 모두 자신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려하던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영연방의 통수권자로 왕이 나설 필요가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조지 6세는 킹스 스피치를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또박또박 감정을 실어 마지막 호소하듯 외친다.
“어떠한 난관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그 맹세를 지킨다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유리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연극은 막을 내린다. 그 라디오 연설이 이리 큰 감동을 줄 줄이야. 이건 코로나로 고통받는 우리에게 주는 희망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감동이, 눈물이 흐르는지 모른다.
2020 연극열전 네 번째 작품 ‘킹스 스피치’는 훌륭했다. 주인공 라이오넬 역을 맡은 서현철의 부드럽고 유머스럽기도 한 연기는 이 연극을 끌어가는 중심이다. 버티(조지 6세)를 맡은 박정복의 말더듬이 연기는 일품이다. 그렇게 더듬다 마지막 라디오 연설에서 폭발하며 극을 하이라이트로 이끈다. 그리고 눈물도 선사하고. 처칠 역의 최명경과 라이오넬 부인인 머틀 역의 이선주도 안정적 연기로 극 전개를 매끄럽게 해 준다.
이 연극은 코믹적인 요소도 조금 있고 감동도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배우들의 열연도 좋았지만 2차 대전 전후 영국의 정치, 왕실의 역사를 배운 것도 좋았다.
근데 왜 엘리자베스 2세 현 여왕의 아들인 찰스 왕세자는 여왕이 그리 싫어했던 한때 왕이 될 뻔했던 큰 아버지 데이비드를 닮아가는 걸까. 묘한 역사의 반복 같은. ㅎㅎ
오랜만에 찾은 대학로는 대극장 뮤지컬에서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감동을 준다. 그리고, 단골집 이자까야에서 술 한잔은 겨울밤을 더 포근하게 해 준다.
집에 가서 킹스 스피치 영화 다시 봐야겠다. ㅎㅎ
2020.12.05. 오후 7:19에 쓰다.
#킹스스피치 #연극 #조지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