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8
(8코스, 19.6킬로, 월평마을 - 대평포구)
본격적인 올레길 걷기 첫날이다. 제주시에서 제법 먼 서귀포 쪽에서 시작한다. 차를 가지고 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버스로 이동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배로 소요될 뿐만 아니라 오늘 같은 다소 외진 8코스 시작점 월평아왜낭목은 중문에서 환승도 해야 한다.
처음부터 올레길 걸어야지 하면서 제주에 온 것은 아니었다. 막연히 책을 한 권 내야지 하고 온 건데, 3월 말 퇴사 예정이니 그전에 머리부터 비워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걷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책은 올레길 걷기 관련 내용은 아니다. 투자와 관련된 내용으로 쓸 계획이다. 그래서, 관련 투자 책도 많이 사고 리디북스에 많이 다운받아 왔다.
회사 출근할 때는 보통 아침을 잘 안 먹거나 먹어도 간단히 해결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순례길이든 올레길이든 걷기 위해서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 아침은 든든하게, 점심은 간단하고 빠르게, 저녁은 푸짐하게 먹는 것이 나만의 패턴이랄까. 돼지 목살 2개에 소시지 하나 그리거 계란 프라이까지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커피까지 한잔 하니 컨디션 최고조다.
한 시간 가까이 차를 몰아 중문색달해변에 도착했다. 왜 월평아왜낭목쉼터가 아니냐고? 거긴 길도 좁고 주차도 애매해서 주차하기 편한 8코스 중간지점인 중문색달해변 주차장에 주차했다. 다시 택시를 탄다. 그리고, 8코스 출발점에 도착한다. 11:18에 드디어 올레길 8코스 출발한다. 가벼운 배낭을 메고 걸으니 발걸음이 가볍다. 시원한 바람이 발걸음을 더 가볍게 해 준다. 바람 소리 그리고 에어팟에서 들려오는 나윤선의 라망(Lament). 유채꽃 내도 바람에 실려 온다.
마을 골목길을 지나니 바닷가를 끼고 걷는 길이 나온다. 작은 돌들과 바위를 밟으며 걷는다.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 잔잔한 파도, 살랑이는 바람. 조금 더 걸으니 바위가 멋진 곳이 나온다. 검은 바위와 바라보며 난간에 걸터앉아 있는 한 여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꼭 바위 위에 있는 갈매기처럼. 그래도 갈매기는 나란히 앉아 있는데.
주상절리도 보고 멋진 몽돌 해변도 보고 그런 해안을 따라 계속 걷다 중문관광단지로 진입한다. 중문에 있는 베릿내오름에 오른다. 끊임없이 올라만 가는 계단과 데크 산책로. 경사도 제법 있다. 그래도 조금 오르니 정상이다. 물 한잔 마시고 다시 일어선다. 돈다. 빙빙. 힘 들어서, 계속 오름 주위를 돌아서. 한참을 걷고 다시 오르기를 반복하니 제자리다. 허탈. 정상에 계신 할아버지께 여쭤보니 여긴 한 바퀴 돌고 내려가는 데란다. 정말 돈다.
걷는 첫날인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어쩌면 애초부터 고민거리가 없었을 것이다. 라인에 있으면서 숱한 어려움, 스트레스와 고통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발바닥의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인 고통을 이긴 것인가? 아름다운 올레길이 과거의 고통을 잊게 만든 건가?
오름에서 다 내려오니 오른쪽으로 가는 화살표가 살짝 보인다. 돌다 이제 길을 제대로 찾은 거다. 그렇게 요트 선착장, 중문 색달해변이 보이는 럭셔리 분위기의 더클리프(The Cliff)를 지난다. 파라솔 아래 햇살을 만끽하며 비스듬히 기대거나 누워있는 연인들이 무척 부러웠다. 그 부러움은 사발면과 맥주로 달래야지. 1:50에 더클리프 옆 편의점에서 같은 전망을 몇천원의 가격으로 즐기며 점심을 해결하다.
2:20에 일어서다. 중문을 빠져나오느라 한 시간을 도로 옆 시멘트길, 옆으로 차들은 계속 지나다닌다. 나도 중문을 그렇게 다녔었지. 발바닥이 터질 듯하다. 그러다 샛길로 새서 풀밭 길을 걷는데 이렇게 폭신할 수가.
여래동부터는 계속 나지막한 내리막 길이다. 지루한 차도 옆 길을 걷다 여래생태공원으로 들어선다. 양 옆으로 벚꽃과 유채꽃이 잘 가꾸어진 산책로이다. 자그마한 개울과 습지대가 형성되어 있어 다양한 식물들도 볼 수 있다. 1주만 늦게 왔으면 벚꽃이 만개했을 듯한데 지금은 조금 이르다. 어떻게 제주시 보다 남쪽인 서귀포 인근에 벚꽃이 올핸 늦지?
논짓물, 제주 최대 용천수 지역이란다. 용천수는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지층이나 암석층에 흐르며 있다가 땅으로 솟아나는 물을 의미한다. 생수로 먹을 수 있기에 제주도의 많은 마을은 용천수 중심으로 형성되었단다. 이곳에 바다를 바라보며 용천수로 만들어진 논짓물 담수욕장이 있다. 해수면에 인접해서 인피니트 풀(Infinite Pool) 같은 장관이 끝내 주는 데 지친 몸으로 인해 찍은 사진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바닷바람 부는 해안길, 아주 길게 이어진다. 걷는다. 또 걷는다. 가우디의 구엘 공원처럼 타일로 장식한 벽이 보인다. 친숙한 대평항이 가까워지고 있다. 대평항은 예전 대학 과친구 세명과 함께 온 곳이기도 하다. 그때 쓴 시가 바로 '대평항에서'이다.
대평항에서
용암이 내리꽂아
달려 달려
내려온 곳!
펄펄 그 용암이
내려오니 만난 찬 바닷물
차가워, 움츠려, 응고된
그 용암은
절벽을 이루고
그게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27년 만의 남자 네놈의 제주여행
그리고, 오늘 소주 한잔이
더 역사이지 않니?
한참을 걸어 4:46에 9코스 시작지점, 즉 8코스 종료지점인 대평항에 도착하다. 23.08킬로, 31,477 걸음. 흑 힘들다.
카카오 택시를 불러 중문색달해변으로 돌아왔다. 힘들게 걸어왔던 길들을 스쳐 지나간다. 지친 몸을 차에 던져 놓고 1시간을 넘게 운전해서 집으로 온다. 근처에서 돼지국밥으로 올레길 첫날을 마무리하다.
그리고, 더 지치고 노곤한 몸으로 제주 내려와서 첫 빨래도 하다.
P.S.
올레 8코스는 작은 시골마을, 해안가, 주상절리를 즐기며 오다 중문 관광단지의 화려함과 마주한다. 호텔들 사이에 있는 오름도 오르면서 기운을 빼놓기도 하지만, 중문을 벗어나기 위해 차도 옆 딱딱한 길을 계속 걷기도 하지만, 여래생태공원의 아기자기한 나지막한 내리막길과 습지를 보는 재미도, 해안길을 따라 지루하게 이어지다 만나는 대평항 절벽의 아름다음도 즐길 수 있다. 코스 상의 거리는 19.6킬로이지만 베릿내 오름을 돌고 내려올 때 길을 헤매지 않으면 20킬로 내로 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