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9
(9코스, 6.7킬로, 대평포구-화순 금모래 해수욕장)
6시에 눈이 떠졌다. 전날의 올레길이 넘 피곤해서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결국 9시 넘어 일어났다. 아침부터 친구 회천이가 전화해서 크립토 투자해도 되는지 물어봤는데 투자하지 말라고 말렸다. 왜 다 늦게 크립토에 관심을 갖는지. 할 거면 비트코인, 이더리움, 아니면 라인이 만든 링크나 카카오가 만든 클레이 같은 큰 기업이 만든 코인에 투자하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뜨끈한 게 먹고 싶어 곰탕국물에 만두를 넣어 만둣국으로 만들어서 먹었다. 든든하다.
발가락과 발바닥에 어느새 물집이 잡혔다. 걷기 전엔 의식처럼 발가락에 밴드를 붙인다. 밴드 네개부터 시작한다. 발가락에 3개, 발바닥에 1개.
물집이 생겼을 때 대처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학설이 분분하다. 꼭 탕수육 부먹파와 찍먹파가 있는 것처럼 물집도 '터트파(터트리자파)'와 '안터트파(안터트리자파)'로 나뉜다. 터트파의 주장은 빨리 터트려 다시 물집이 생기게 하고 그걸 또 터트려 며칠 반복하면 빠르게 굳은살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럼 그다음부터는 아주 편하다는 논지다. 안터트파는 물집 위에 밴드를 붙여 계속 걸으면 물집이 자연스럽게 터지거나 밴드에 스며들게 만드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굳은살은 잘 안 생기지만 터트렸을 때의 고통 없이 걸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각기 단점도 있다. 터트파의 주장에 따라 물집을 터트리면 걸을 때나 샤워할 때 물집에 굳은살이 생기기 전까지는 무지 따끔거린다. 안 터트리면 매일 아침 밴드를 새로 붙여야 할 뿐만 아니라 봉긋하게 솟은 물집을 터트리고 싶은 유혹을 참고 견뎌야 된다. 난 두 방법 다 써봤는데 안터트파의 학설이 좀 더 우세하다고 믿는다.
집을 나서 차를 몬다. 제주-중문을 가로지르는 평화로를 달린다. 1시간은 족히 걸린다.
대평항까지 오는 찻길은 급경사에 좁은 외길로 거의 죽음이었다. 앞에서 차가 오면 뒤로 차를 빼기도 너무 좁고 한쪽은 길도 비포장이다. 무사히 오게 됨을 감사드리며 잘 주차했다. 전날에도 온 대평포구에서 1:51에 출발하다.
오늘 걷는 9코스는 대평-화순 코스로 섬 코스를 제외한 올레길 코스 중에서는 가장 짧은 6.7Km이다. 그래서 비교적 늦은 1:51에 출발해도 한걸음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일 것 같았다.
계속 언덕이 이어진다. 언덕을 오르니 오른쪽으로 길 표시가 되어 있다. 그때 한 청년이 왼쪽에서 나오면서 이쪽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전망 좋은 곳이 나온단다. 그래서 올레길 코스에서 잠시 벗어나 그곳으로 향했다. 전망대에선 전날 걸은 중문, 대평항 등이 시원하게 보인다. 외진 좁은 길을 헤치며 잘 온 것 같다.
전망대에서 나와서 계속 걷는다. 또 하나의 오름이 이어진다. 2시 30분부터 허기가 올라온다. 배가 고프니 다리에 힘도 없어진다. 땀도 비 오듯 내려온다. 옴메. 언능 뭐라도 먹어야 살 것 같은데 오르막만 이어지고 쉴만한 곳이 안 보인다.
3시에 200미터 높이 월라봉 하나 옆으로 넘고 처음 쉬다. 고작 1시간 넘게 걸었는데 이렇게 기운이 딸리다니. 가장 짧은 9코스 6.7킬로를 너무 얕봤나? 코스가 짧은 건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테인데 말이다. 봉우리 연속 2개 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코스이다. 그래도 구운 계란 2개 먹으니 허기는 조금 가신 듯. 계란으로 에너지 충전 60% 완료. 나머지 40%는 내려가서 막걸리로 ㅎㅎ
이제부턴 내리막 길이다. 귤나무 밭을 지난다. 그런데, 올레길 바로 옆 길가의 귤나무만 수확하지 않은 귤이 달려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길가의 포도나무를 순례자들을 위해 수확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일까? 따먹고 싶다. 그렇지만 참는다.
3:57 10코스 시작점에 도착하다. 바람이 거세다. 8.67킬로 11,578보를 걷다.
택시로 대평항으로 이동한다. 대평항에서 도다리물회에 땅콩 막걸리 한잔하다. 파김치, 오뎅볶음 등 반찬은 맛있는데 정작 물회는 맹물 국물 맛이다. 흑. 막걸리가 아깝다.
차에 시동을 거니 막 8코스를 걸어온 한 청년이 보인다. 어디 가냐고 물으니 게스트하우스 간단다. 태워주면서 얘기하니 3년 근무한 회사 관두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기 전에 올레길 걷는 단다. 나도 3년 근무한 회사 관두고 올레길 걷는 건데. 하루에 30킬로씩 걷는다는데 그 젊음이 부럽다. 나도 2년 전에는 무거운 배낭 메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그렇게 걸었었는데. 지금은 그리 못할 것 같기도. ㅎㅎ
다시 운전해서 제주시로 온다. 숙소 근처 포차에서 제육볶음에 한라산 소주 한잔 한다. 숙소 근처에서 맘 편히 먹으니 좋다. 오늘 처음 들른 유행포차, 포차 안 벽에서 멋진 한시를 발견하다.
갑자기 내 시도 쓰고 싶어 졌다. 용두암에서 쓴 시, '고독 1'을 주인장의 허락을 받아 벽에 쓰다.
고독 1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 있으면
고독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막상 그렇게 해보니
파도소리도 들어야 하고
구름 흘러가는 것도 봐야 하고
바람도 느껴야 한다
바쁘다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고
시간도 내버려 두는데
자연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고독할 틈이 있겠는가
포차의 주인장 누님과 술잔을 기울이다. 순전히 손님이 나 밖에 없어 그런 거겠지, 비가 외서 그런 거겠지. 근데 얘기해 보니 국문과 출신에 신주쿠 요리사 5년 경력 등 얘기거리가 많다. 술잔은 비어 가고 비는 잦아지네.
그렇게 제주의 밤은 깊어간다.
P.S.
올레 9코스는 짧다. 짧지만 맵다. 가파른 월라봉에 오르면 시야가 확 터진다. 그 기분은 다시 걷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감귤밭을 끼고 내려오면 안덕계곡이 이어지고 이내 화순해변에 다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