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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08. 2021

13 올레길은 오늘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20210326

올레길은 오늘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6코스, 11킬로, 쇠소깍-제주올레여행자센터)


8시에 일어나 옥상에서 공항과 바다를 바라보며 모닝커피 한잔하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나윤선의 재즈와 함께 하는 소박한 아침, 들기름 두른 두부와 계란 프라이 그리고 요구르트 한 개. 창문으로 제주의 상쾌한 공기가 들어온다. 아 좋다.  


식사를 마칠 무렵 나윤선의 라망(Lament)이 흘러나온다. ‘I'm not ready to stay, I'm not ready to go, I’m not ready to fly, I’m not ready to give up’. 가사가 꼭 내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10시에 집을 나선다. 오늘은 우석이가 서울에서 오는 날이라 차를 두고 600번 버스 타고 서귀포에 있는 '제주올레여행자센터'로 간다. 버스정류장, 노선표 보며 멍하니 있다 600번 버스를 눈 앞에서 놓쳤다. 흑. 20분 더 기다려서 버스를 타다.


12시쯤 샛가정공원 하차했다. 원래 생각했던 버스 종점까지 안 가고 도중에 네이버 지도를 켜서 본 게 개이득이다. 바로 여기가 올레 6코스 종착지. 오늘은 이 길을 거슬러 5코스 중간 지점까지 역방향으로 올라간다. 올레센터에서 간세와 올레 화살표를 사서 배낭에 달고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12:15이다.  



서귀포 시내에서 리본을 계속 놓쳤다. 그래서 아예 네이버 지도를 켜고 걷는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뜨겁다. 이중섭 거리를 지난다. 그의 앙증스러운 그림이 난 좋다. 이중섭 그림을 벽화로 옮겨 놓은 것에 빠져 또 길을 잃다.



서복전시관을 끼고 정방폭포 방향으로 걷는다. 우측으로 바다가 보이고 햇살은 뒤에서 비춘다. 역방향으로 걸으니 해 등져서 좋네. 역방향은 오렌지색 화살표다(정방향은 파란색 화살표). 그래서 오늘 상의도 오렌지색으로 깔맞춤 했다. ㅎㅎ



깎아지는 절벽 위로 기가 막힌 올레길을 만들어 놨다. 주상절리, 폭포,  멀리 보이는 , 그리고 전망 좋은 곳에 있는 카페. 눈이 호강한다. 더베이리조트의 멋진 카페 앞에 있는 전망대에서 사진을 하나 부탁해서 찍었다. 이번에도 여인에게 부탁해서 찍었다. 오렌지색 상의와 검은   대비가 맑은 날씨와 더불어  두드러진다.



저 멀리 섶섬이 보인다. 숲길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소천지라는 곳이 나온다. 여기서 맑은 날 햇빛 방향에 잘 맞추어 한라산 방향으로 찍으면 한라산 그림자가 비치어져 장관이라고 한다. 나도 시도해 봤는데 그림자가 전혀 지지 않았다. 그래도 저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는 게 얼마나 좋으냐.



섶섬을 눈 앞에 두고 작은 포구를 지난다. 오후 2시, 7.4킬로 와서 처음 쉬다. 할머니 혼자 계신 진동산 쉼터에서 쉬며 쉰다리를 한잔 하다. 쉰다리는 누룩으로 만든 음료인데 막걸리 맛이 살짝 난다. 편의점 시원한 콜라보다 훨 낫다. 할머니의 정을 느끼다. 요기로 약과도 하나 먹다.  



쉰다리 먹으며 앉아서 보니 저쪽에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사랑’이란 문구가 보인다. 역시 멈추고 쉬면 안보이던 게 보인다. 그리고, 말 그대로 스치기만 해도 인연인데, 스며들면 사랑으로 커진다. 그래, 나도 올레길 걷고 스치면서 많은 인연을 만들 수 있겠지. 사랑까지 하는 건, 음. 그건 안돼! 쫓겨나. 애정(愛情) 중에서 애(愛)는 안되더라도 정(情)은 되겠지. ㅎㅎ


2:15에 다시 일어선다. 숨 헐떡 거리며 오르내리락 한 제지기 오름을 끼고 쇠소깍으로 가는 해안도로 길이 참 이쁘다. 야자수 같은 나무, 동백나무와 돌담 이건 색다른 풍경이다.  



특히 쇠소깍은 한라산 백록담 남벽과 서벽에서 생겨나 해안으로 이어지는 하천인 효돈천이 바다와 만나면서 생긴 곳이다. 깊은 수심, 기암괴석, 울창한 소나무 숲이 절경을 이룬다고 설명되어 있는데, 오늘 같이 맑은 날에 그 짙은 옥색 물빛과 깎아지는 절벽, 그리고 푸르디푸른 숲의 조화가 천하일색이로세. 한가히 배 띄워 노니는 모습을 보니 한 폭의 동양화로세.



쇠소깍 다리 바로 옆 6코스 시작점에서 스탬프를 찍고 계속 걷는다. 위미항이 보이는 어느 한적한 해안가에 중년의 남녀가 꼭 껴안고 있다. 지나치기 뭐해 멀찍이 떨어져 물 한잔 마신다. 근데 자리를 뜨며 아이스커피 플라스틱 컵을 잘 안 보이는 곳에 곱게 버려두고 간다. 흑. 내가 주워 배낭에 넣고 걷는다. 가다 그 커플을 지나쳤는데 뭐라 한마디 하려다 참는다. ㅎㅎ


오늘 우석이와 만나기로 한 '어느 멋진날'을 지나친다. 약속시간까진 1시간 남아 지난번 5코스 못 걸은 중간지점까지 더 걷는다.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한다. 친구 은익이네 집까지 걷고 다시 돌아오니 오후 5:50. 그곳에서 얼굴 벌게진 은익이가 반겨준다. 짜슥 네시쯤 통화할 땐 제주시라 했더만 언제 와서 술 푼 거지? ㅋㅋ 제주 뱃사람 다 되었네.  


오기로 한 우석이가 40분은 더 늦었다. 이 녀석은 매번 늦는다. 서울서는 일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제주에서도 늦는 건 버릇이다. ㅋㅋ 우석아, 제주도도 사람 살고 출퇴근 한단 말이야. 러시 아워 시간엔 당연 차 막힌다고. ㅎㅎ


오늘 22.24킬로, 쉰 시간 빼고 5시간 30분 동안 걷다. 6코스 완주와 5코스 절반으로 지난번 못 걸은 5코스 아랫부분도 다 걸었다. 흑.  



드디어 우석이와 여친이 들어온다. 소주도 6-7병을 사 온다. 참, 위미항에 있는 이곳 '어느 멋진날'은 내가 제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횟집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에 나왔던 '카페 서연의집'도 바로 근처다. 우린 돌돔코스로 시켰는데 처음 나오는 것은 돌돔의 입술, 껍질, 간, 내장, 뽈기살 등 특수부위가 나온다. 다른 곳에서는 손이 많이 가 해주지 않는 부위다. 사 오라 했던 '모에 썅똥' 샴페인부터 먼저 시작했다. 술이 술술 넘어간다.



친구 은익이가 부탁해서 이모님이 참치 내장도 주셨다. 이건 또 딴 나라 식감이다. 참치가 크다 보니 내장도 넘 큰데 맛도 곱창에 비할바 아니다. 생선 뼈로 우려낸 뼈국과 참돔구이도 넘 맛났다. 참돔은 크기도 무척 크지만 두께도 한 면만 1센티가 넘는다.


나를 이어 라인에서 언블락과 LTP(LINE Tech Plus) 대표를 맡게 된 우석이, 대표 노릇하기 힘든 것 같다. 같이 욕 많이 해줬다. 그래서 더 술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취중진담, 나중진땀 이라는 말도 있는데 오늘 진땀 흘릴 말은 안 했으리라. ㅎㅎ


우석이는 대학에서 가르칠 때 제자인데 그때부터 사귀었던 여친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내가 라인 있을 때 이 둘을 결혼시켰어야 했는데 그걸 못하고 나와서 아쉽다.



거나하게 좋은 안주에 술을 마시고 우석이의 차를 대리 불러서 가는데 얘는 계속 코 골며 잔다. 그 소리 한번 크네. ㅎㅎ  


12:30에 집에 돌아오다. 아직도 헤롱 된다.  


P.S.

6코스는 서귀포에서 역방향으로 쇠소깍까지 오는 코스도, 쇠소깍에서 서귀포 방향으로 가는 코스도 다 재밌고 좋을 것 같다. 난 역방향으로 걸었는데 처음 서귀포시 빠져나올 때 조금 지루하기도 했지만 바로 나오는 정방폭포부터의 절경, 잘 꾸며진 산책로, 제지기 오름, 그리고 바다와 기암절경 쇠소깍까지 너무 좋았다. 올레길은 오늘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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