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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13. 2021

17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사랑

20210330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사랑

(15-B코스, 13킬로, 한림항-고내포구)


퇴사 전날, 꾸역꾸역 아침을 해 먹는다. 채끝 등심에 가니쉬로 버섯을 그리고 들기름 두른 연두부까지 많이 준비했다. 맛은 있았지만 그것보다는 걷기 위해서 억지로 먹는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풍성하게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선다. 9:41. 고내포구까지 15킬로, 30분. 이제 제주시 숙소에서 많이 가까워졌다.  


애월해안로를 타고 천천히 오느라 예정 시각보다 조금 지연되었다. 그래도 고내포구에 무사히 주차하다. 사실 차를 가지고 올레길 다니다 보니 거리와 동선도 중요하지만 안전한 주차공간 확보가 최우선이다. 그래서 네이버 지도도로 현장 사진을 통해 주차공간이 있는지 매일 확인하는데 이게 상당히 유용하다.  


어제 보다는 미세먼지가 덜하다. 카카오 택시를 부른다. 오늘은 월령포구까지 30분 정도 소요된다. 흑, 꽤 멀다. 그만큼 많이 걷는단 얘기겠지. 하긴, 어제 못 걸은 14코스 절반과 15-A 코스를 걸으니.



어제 마지막까지 걸었던 월령포구에서 11:04에 출발한다. 바람이 조금 불지만 화창한 날씨다. 풍력발전기도 시원하게 돈다. 비양도를 바라보며 걷는 바닷길. 걸을수록 비양도의 옆면, 앞면, 반대면이 순차적으로 보인다. 이것도 걷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겠지. 참, 비양도는 1002년 고려 목종 시절에 분출한 화산섬으로 제주 화산섬 중 가장 어리다고 한다.  



비양도 앞 협재해변은 바다 빛이 에머럴드 색으로 너무나 맑고 푸른빛을 띤다. 제주 바다 중 색깔이 가장 이쁜 곳 중 하나가 아닐까?



야자수 나무와 하얀 백사장. 지난번 워밍업 차원에서 왔던 협재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그땐 월령포구 방향은 걷지 않고 바로 백사장 쪽만 나들이하듯이 걸었으니 뒤편을 못 봤겠지. 그 뒤편에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역시, 해안가 모든 길을 걸으니 좋은 곳을 알게 된다.  



협재해변을 지나 한림으로 들어선다. 저 멀리 파란 간세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파란 지게차 팔레트다. 흑. 이젠 파란 모양은 다 간세(조랑말 모양의 올레길 상징물)로 보인다. 올레꾼 다 된 거다. ㅎㅎ


한림항에 있는 14코스 종착지로 가는 일자로 쭉 이어진 방파재 길은 넘 지루하다. 그래, 가다 보면 어찌 멋진 길만 있겠어. 이런 길도 가끔은 있어야지.  



오후 2:53에 14코스 종점 도착한다. 7.66킬로를 걷다. 스탬프 찍고 물 한잔 하다. 어제 14코스 초반부 걸을 때 만났던 아저씨를 또 만났다. 15코스 A,B 중 어느 코스 걸으실 거냐 물어보니 조금 가다 A/B코스 갈림길에서 선택하신단다. 나도 그 아저씨를 따라나선다.  



15코스 A/B 분기점이 내가 먼저 왔다. ㅎㅎ 뒤돌아 보니 아저씨도 나를 따른다. 지나가는 강아지도 날 반겨준다. 하늘을 낮게 나는 비행기도 보이는 걸 보니 확실히 공항 근처에 가까운 것 같다.  


딱딱한 해안도로를 계속 걷는다. 발바닥이 아파온다. 배도 고파온다. 귀덕리를 지나는 데 한 작은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이 보인다. 푸른 바닷 빛과 외로운 배 한 척. 너는 왜 정박해 있는가? 정박이 배의 목적은 아닐 텐데. 아니야, 저 친구도 위험한 바다를 열심히 다니다 오늘은 쉬는지도 몰라.



오후 2:20에 금성천 정자 앞 중간 스탬프 찍는 곳에서 누님 다섯 분을 만나다. 배고프고 안쓰러워 보이셨는지 떡을 한 덩어리 주신다. 거기에 따뜻한 커피까지. 꿀맛이다. 누님은 사랑이시다. 맛있고 배부르게 먹은 답례로 내 책 ‘쫄지말고 떠나라’에 사인해서 드렸다. 이복자 누님, 배고픈 올레꾼 챙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6코스 걸을 때 작은 쉼터에서 본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사랑'이란 문구가 떠오른다. 그래, 멈춰서 말 한마디 건네니 인연이 되었고, 떡과 커피를 나누고 책도 드리니 스며들어 사랑이 된 거다. 이런 만남 너무 좋다.  

사진도 몇 장 부탁드렸다. 친절하게 사진까지 앞뒤 포즈로 다양하게 찍어주신다. 찍기 전 한 소리 하신다. ‘배 집어넣고!’  ㅎㅎ  



누님들도 5코스부터 걸으셨다는데 숲 코스가 있는 14-1코스가 제일 좋으셨단다. 난 어제 14코스로 바로 내려왔는데 나중에 꼭 가봐야겠다. 누님들과 덕담하고 서로의 여행을 축복해주며 헤어졌다. 책 한 권 가지고 다닌 것은 탁월한 선택인 듯. ㅎㅎ 작가님 이시구나 하면서 얘기해 주시는데, 책 제목도 잘 지었다고 해주시는데 넘넘 뿌듯했다.  


애월빵공장 언덕을 넘어오니 하얀 모래밭 해변이 펼쳐진다. 지난번에도 왔던 곽지해수욕장이다. 아름답다. 서핑을 배우려고 나란히 앉아 있는 초보 서퍼들의 뒷모습이 귀엽다.  



곽지해변을 지나 해안길 산책로로 진입한다. 그 길을 따라가니 카페 '봄날'이 나온다. 무수히 많은 연인들, 차들 그리고 음악과 대형 카페들. 청담동 분위기다.  



한림부터는 해안도로 코스라 죄다 시멘트 바닥이다. 19킬로를 걸으니 발바닥 터지겠다. 어디 흙길이나 돌길 좀 없수? 거의 지쳐 쓰러질 무렵, 골목길을 돌아 나오니 고내포구가 보인다. 다 왔다. 오후 4:03분 도착하다. 4시간 34분 동안 19.33킬로를 걷다.  


올레 안내소 선생님이 올레길은 놀멍 쉬멍 천천히 걸어야 한단다. 간세도 게으른 조랑말이라면서. 내일부터는 놀멍 쉬멍 걸어야 갰다.  


차로 30분도  걸려 숙소로 돌아오다. 샤워를 하고 약속 장소인 두루두루식당으로 향한다. 라인에서 함께 근무한 학교 후배 서준용이 조금 늦는단다. 얘들아, 제주도  막힌단 말이야. ㅎㅎ 그래도 구좌읍에서 선배 보러 온다니 참아야지. ㅎㅎ 



준용이 오는 시간에 맞춰 미리 주문한 객주리 조림이 나왔다.  한잔 하며 Fire(퇴사, self-fired)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대해 얘기했다. 후배는 와이프와 꼬맹이랑 같이 제주 와서 먹자 여행을 다니고 있던데, 그래도 혼자 있는 선배 생각해 연락해줘 고마웠다. 덕분에 술도 많이 마시고.  


숙소에 돌아왔는데 잠이 잘 안 온다. 내일 퇴사일이라 그런가? 그런 건가? 흑.  


P.S.

14코스 후반부는 월령포구를 지나 비양도를 바라보며 협재로 들어가는 길이 참으로 이쁘다. 그 이후 딱딱한 해안도로를 지나고 곽지해변과 애월의 카페들, 아름다운 바다 옆 산책로를 걸으면 어느새 고내포구로 들어선다. 모든 올레길이 기승전결이 있는데 14코스를 하루에 걷는 다면 좀 더 그런 느낌이 들 것 같다. 초반의 소나무길, 월령 선인장길, 협재해변과 한림항까지 짜임새가 있는 길이다. 다만, 협재를 지나고부터 한림항까지는 조금 지루한 길이 이어지며 딱딱한 시멘트 바닥이 제법 많이 발바닥은 다소 아프다.  


15코스는 아기자기한 집과 곽지-애월 해변길이 아름답다. 애월에 들어서면서 많은 카페와 그 화려함에 입이 벌어지기도 한다. A코스에 비해 해안로로 걷는 B코스는 짧기도 하지만 길은 딱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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