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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11. 2021

16 저지오름에서 지친 심신, 월령에서 위로받다

20210329

저지오름에서 지친 심신, 월령에서 위로받다

(13코스, 15.9킬로, 용수포구-저지예술정보화마을)

(14코스, 10.1킬로, 저지예술정보화마을-월령선인장자생지)


어제 17킬로 정도 걷고 살짝 아쉬움이 남아 오늘은 한 코스 반을 걸을 예정이다. 즉, 13코스와 14코스 절반 해서 26킬로 정도. 지금까지 걸은 거리 중 가장 많이 걷는 거다.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하다. 꼭 나의 앞날처럼. 어제 보다 몇 배는 짙어진 안개와 미세먼지로 앞이 하나도 안 보인다. 이 안개도 언젠간 걷히겠지.


눈은 일찍 떠졌다. 7시쯤. 회사 다닐 때도 이 시간에 일어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제주 내려와서 잠이 점점 없어진다. 하루에 여섯 시간쯤 자는 것 같다. 두부에 들기름 둘러서 볶음 김치와 같이 소박한 아침을 차렸다. 이거 먹고 오늘은 좀 많이 걸어야 한다.  


9:30쯤 집을 나선다. 제주시로 올라오는 올레 코스라 그런지 점점 출발점까지 이동거리가 짧아진다. 한 코스 반을 걷는지라 오늘은 조금 일찍 출발한 거다.


애월 해안도로로 계속 내려온다. 안개도 서서히 걷히는데 날은 흐리다. 기름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녀석도 날 데리고 올레길 여기저기 다니느라 고생 많았다. 오늘 완주 후 돌아가는 길에 밥 좀 먹여야겠다.  


아침 기온이 16도 인걸 봐서는 오늘 꽤 더울 것 같다. 14코스 중간지점인 월령포구에 주차하고 다시 택시로 이동한다. 13코스 출발점인 용수포구까지 12분 걸린다. 차도로는 가깝다. 그건 해안에 있는 포구에서 내륙 13코스 종점인 저지마을을 찍고 다시 14코스로 해안가로 내려와서이다. 오늘 13코스 16킬로와 월령포구까지 10킬로, 도합 26킬로 잘 걸을 수 있겠지? ㅎㅎ


10:53에 한적한 용수포구에서 물 한잔 하고 출발한다. 바람이 좀 분다.  



미나리 밭을 지난다. 참, 영화 미나리도 봐야 하는데. 계속 이어지는 돌담길, 참 이쁘다. 소나무도 새순이 올라온다. 보리밭에 외롭게 핀 꽃 한 송이도 보인다. 그렇게 걷다 고사리 숲길로 들어선다. 무성한 고사리와 나무를 휘감고 푸르게 덮은 담쟁이 잎이 조화롭다.  



큰 도로가 나오길래 계속 직진했더만 길을 벗어났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1킬로 훨씬 더 걸어 올레길 리본을 발견하다. 맘이 놓인다. 오늘 많이 걷기로 했다 보니 맘이 급해졌나 보다. 리본도 잘 보면서 천천히 걷자. 그런데 가다 보니 용수 저수지 코스도, 특전사 숲길 코스도 막혀 우회로로 가야 해서 더 헷갈렸던 거다. 그리고, 이번 코스는 유독 리본 찾기가 힘들다. 간격도 멀고 다 숨어 있는 듯.  



양파, 마늘, 양배추 수확 풍경이 펼쳐진다. 점심때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새참 드시고 계신데 구수한 밥맛이 바람에 실려온다. 나도 '한끼줍쇼'하며 합류하고 싶다. 바람에 실려오는 유채꽃 향기로 그저 허기를 좀 달랜다.  


중간 스탬프 찍을 수 있는 간세를 발견하다. 스탬프 찍고 계속 간다. 동림원, 동구내, 동구밖을 지나니 과수원길이 아닌 아리랑 길이 나온다. 이건 고개다. 그리고 바로 나오는 해발 239미터의 저지오름. 내 체력을 Judge 하는 건가? 흑.  


올라오니 바람도 살랑대고 숲 냄새 가득해서 좋다. 오름 둘레길 가벼운 발걸음으로 돈다. 그렇게 돌아서 오른 정상 전망대, 온 사방이 뿌옇다. 이 극심한 미세먼지로 하나도 안 보인다. 오늘 같이 미세먼지 극심한 날은 마스크 쓰고 걷는 게 더 힘들다.


걷는데 학교 후배이기도 한 라인에서 같이 근무한 서준용에게서 연락 온다. 오늘부터 한 주간 제주에 있단다. 내일 저녁 객주리 조림으로 유명한 ‘두루두루식당’으로 예약했다. 무슨 얘기를 나눌지, 술은 또 얼마나 먹을지 기대된다. 아니 지난번 우석이와 먹을 때처럼 올레길 단련으로 올라온 체력만큼 얼마나 많이 퍼부울지 걱정된다.  



저지오름은 내려올 때도 젖지(Judge)를 잘해야 한다. 오름 정상에 오르고 나머지 둘레길 반 바퀴를 돌아서 원래 자리로 내려와서 왼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만 화살표를 발견 못하다 길을 물어물어 저지마을로 겨우 내려왔다. 오름에 올라 한비퀴 돌고 내려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흑.  



오후 2:33에 13코스 종점이자 14코스 출발점인 저지마을에 도착했다. 3시간 36분 동안 16.18킬로를 걸었다. 간단히 계란 두 개와 소시지 하나로 요기하다. 올레 안내소에서 티셔츠 하나 사고 출발 방향을 헤맨 끝에 3:02에 다시 14코스로 출발했다. 여긴 14코스와 14-1코스가 있어 헷갈리긴 하다.  


올레, 제주 사투리로 '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아주 좁은 골목 비슷한 길'을 의미한다. 그 의미에 딱 맞는 길을 걷다. 향긋한 풀내음과 꽃내음이 코를 찌른다. 바위에 앙증맞게 파랑과 주황으로 화살표 표시해 둔 것도 정겹다.  



20킬로가 넘어가면서 발바닥도 아프고 힘이 든다. 음악의 힘을 빌려야겠다.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이 나온다. 2017년에 발표된 노래가 역주행해서 최근 1위를 하고 있는 곡이다. 올 2월 멤버들 모두 거의 포기했을 때 1년 전 댓글 포함하여 올린 영상이 뒤늦게 유튜브 알고리즘에 추천되어 역주행했다. 이 영상에서 댓글을 보면 웃음을 금치 못할 것이다. 사실 아무도 찾지 않는 백령도, 지방 오지 든 군부대 공연으로 군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선임과 후임, 제대하더라도 대대로 이어진 생명력 영향이 크겠지.


최근 제작자이자 작곡가 용감한형제는 TV에 나와서 자신 회사의 걸 그룹 '브레이브 걸스'의 역주행과 성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기다렸다기보다는 포기를 안 한 것 같다" 맞다. 성공할 때까지 계속 실패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공에 이른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다.



선인장 밭이 나온다. 그리고 개울을 끼고 걷는 소나무 숲길. 너무 길다. 참으로 길다. 그것도 거의 일직선이다. 발바닥, 발가락 모두 아파온다. 그래도 이국적인 풍경은 아름답다. 선인장에 달려 있는 보라색 백년초도 귀엽다. 드디어 바다 내음이 밀려온다. 마지막 개울을 끼고 내려가자 있는 선인장 밭이 운치도 있고 피곤도 잊게 해준다.  



월령 마을로 들어선다. 돌담에  선인장이다. 월령 선인장 군락지는 국내 유일의 야생 군락지라고 한다. 제주도 서쪽에 있는 월령에 어떻게 선인장이 들어왔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선인장 씨앗이 선인장 원산지인 멕시코에서 해류(쿠로시오 난류) 타고 이곳에 밀려와 모래땅이나 바위틈에 기착한 것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멕시코에서 지구를 거의  바퀴 돌아서 죽지 않고 제주 월령까지 오다니.  



드디어 바다 바로 옆 바위에 자생한 선인장들을 보다. 딱딱한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자생해온 끈질긴 생명력과 그것이 군락을 위룬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다. 선인장 외에 다양한 식물들이 바위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런 선인장과 다양한 식물들을 보면서 거닐 수 있는 멋진 산책로가 있다는 사실에, 그 산책로가 올레길이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산책로 저 멀리 외롭게 돌아가는 바람개비도 운치 있다.  



오후 5:23에 월령 선인장 자생지에 도착. 14코스 중간지점. 흑 힘들다. 13코스 종점에서 추가로 2시간 16분 동안 10.2킬로를 걸었다. 합이 5시간 52분 동안 26.4킬로 주파. 흑.  


바다를 끼고 있는 선인장 자생지는 26킬로 지친 육신을 위로해준다. 시원한 바닷바람도 오늘은 좋네. ㅎㅎ 


다시 차가 세워진 용수포구에서 거의 여섯 시쯤 집으로 출발한다.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오는 길에 배고픈 차에게도 기름을 많이 먹였다. 이젠 내 위도 채워야겠다.  


매번 가던 정든식당이 오늘 쉬어 그 옆에 '몰오랑'이란 국밥집으로 왔다. 사이다 한잔 원샷 하니 이제 살 것 같다. 맥사도 맛나네.  


P.S.

13코스는 해안가 용수포구에서 중산간 지역인 저지오름까지 가는 코스라 전반적으로 오르막이다. 그리고, 그 끝에 저지오름이 있다. 끝까지 체력을 잘 비축해서 가야 할 필요가 있다. 올라오면서 양파, 양배추, 마늘 등 다양한 농작물이 있는 밭을 지나고, 보리밭도 많이 보인다. 저지오름은 경사도 제법 있지만 날씨가 좋은 날에 오면 해안과 한라산까지 다 보이는 전경이 멋있을 것 같다.


14코스 전반부는 계속 해안가로 내려가는 코스다. 걷기는 어렵지 않다. 다소 긴 소나무 밭을 지나면 해안가가 나오고 환상적인 선인장 군락지를 즐길 수 있다. 충분히 매력적인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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