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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09. 2021

15 영겁 세월의 흔적 엉알길, 돌아가지 말라는 차귀도

20210328

영겁 세월의 흔적 엉알길, 돌아가지 말라는 차귀도

(12코스, 17.5킬로, 무릉외갓집-용수포구)


7:30에 일어나 재즈 들으며 커피 한잔 하다. 두부, 소시지, 계란 프라이 그리고 만두로 아침 든든하게 해결하고 9:40에 집을 나선다.  



장범준의 벚꽃엔딩을 들으며 벚꽃 흩날리는 도로를 달린다. 가사처럼 이런 벚꽃길은 둘이 함께 걸어야 더 좋긴 한데. 담주면 이 벚꽃도 다 지겠다.


신창해안도로로 접어든다. 안개 낀 바다 위 일렬로 늘어선 풍력발전기가 신비롭다. 안개로 잘 안 보이다 가까워지면 거대한 움직임과 함께 그 자태를 서서히 드러내는데, 여백 있는 수묵화가 그려진 화선지에서 현대문명의 큰 기계가 돌아가는 느낌이다. 동양과 서양의 조화랄까.  



10:45 12코스 종점인 용수포구에 도착한 후 카카오 택시를 부른다. 첫 번째는 실패, 두 번째는 성공. 택시 수락해준 기사님께 감사드린다. 택시로 가니 14분이 소요된다. 이 거리를 5시간 정도 걸어서 와야 한다.  


11:06에 12코스 무릉외갓집에서 출발한다. 무릉외갓집은 약간 외진 곳이다. 계속 밭을 지나간다. 여긴 유난히 양배추가 많다. 양배추에 떨어진 벚꽃도 보인다. 마늘 밭 옆 돌담길이 나온다. 길 가운데 자란 풀과 오른편 마늘밭이 조화를 이룬다.  



초반에 오름이 하나 있다. 다음 주 부활절을 앞두고 있는 고난 주일에 걷는 올레길. Via Dolorosa(비아 돌로로사), 고난의 언덕길을 오르며 나도 고난에 조금 동참해본다. 에어팟을 꼽고 Via Dolorosa도 반복해서 듣는다. 숨을 헐떡 거린다. 땀도 올라오고. 헉헉. 찢긴 몸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오름에 오르고도 쉬지도 않고 물도 안 마시고 계속 걸어간다.



보리밭이 또 나온다. 여긴 제법 보리가 영글어지려고 한다. 수확한 양배추 밭에 핀 양배추꽃도 보인다. 계속 밭을 지나다 드디어 바다가 보인다. 중산간 지역인 저지오름 쪽에서 다시 해안으로 내려온 것이다.



신도포구를 지나 오후 1:29에 수월봉을 오른다. 결코 수월하지 않다. 왜냐면 안 쉬고 2시간 반 가까이 12킬로를 걸어서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걸을 때처럼 오늘 처음으로 두 시간에 10킬로를 걸었다. ㅎㅎ 이제 몸이 걷는데 최적화된 것 같다.



수월봉까지의 12코스는 밋밋하다. 12코스 왜 이래 하는 순간 펼쳐진, 바다를 끼고 다양한 지층을 볼 수 있는 엉알길은 한마디로 예술이다. 엉알은 낭떠러지 아래라는 뜻이라는데, 수월봉 아래 낭떠러지 아래에 기가 막힌 이 길이 올레길의 피로를 다 날려준다. 겹겹이 쌓인 지층과 바람과 파도에 깎인 절벽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영겁의 세월을 견디며, 깎이고 쓸린 그 시간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게 꼭 가우디의 '까사 미아(Casa Mila)' 같은 곡선의 미학이 있다. 역시 위대한 건축은 더 위대한 자연에서 영감을 받는 것인가?   



라인 함께 근무했던 역주가 오늘 슬기 결혼식 축의금을 대신 내주었다. 축의금 인증샷을 보내오길래 나도 올레길 사진 몇 장 보냈다. 힐링 좀 되었냐고 묻는데 완전 힐링되었지. 넘 좋아 눌러 안게 될지도 모르지. ㅎㅎ


엉알길을 천천히 내려온다. 왼쪽에선 파도가 철썩거린다. 바람은 좀 불지만 오늘은 괜찮다. 이 아름다움을 접하기 위해 이 정도 바닷바람은 맞을 만하다. 가뜩이나 고난주간이 아니던가.


오후 2:13, 14.65킬로를 걷고 처음 쉬다. 배도 고파 차귀도가 보이는 자구내 포구에서 옥돔구이로 늦은 점심을 먹는다. 만원짜리 밥상 클라스 좀 보소. 쌈에 젖깔에 구이에 반찬이 10여 개가 넘네. 어찌 맥주 한잔 안 할쏘냐.  



차귀도(遮歸島), 지명의 유래가 재미있다. 돌아가는 것을 차단시켰다는 뜻을 간직하고 있는데 '네이버 지식백과'의 도움으로 그 내용을 실어본다.


옛날 중국 송나라 푸저우(福州) 사람 호종단(胡宗旦)이 이 섬에서 중국에 대항할 큰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여 섬의 지맥과 수맥을 모조리 끊은 뒤 고산 앞바다로 돌아가는 길에 날쌘 매를 만났는데 매가 돛대 위에 앉자 별안간 돌풍이 일어 배가 가라앉았다. 이 매가 바로 한라산의 수호신이고 지맥을 끊은 호종단이 돌아가는 것(歸)을 막았다(遮) 하여 대섬(죽도)과 지실이섬을 합쳐서 차귀도라 불렀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차귀도 [遮歸島] - 사람 발길을 다시 허락한 제주 서쪽 무인도 (한국의 섬 - 제주도, 2017. 3. 15., 이재언)



점심 맛나게 먹고 2:45 다시 출발한다. 밥 먹고 당산봉을 오르니 넘 숨찬다. 배를 가득 채워서 더 그런가 보다. 꾸역꾸역 올라오니 시야가 확 터진다. 그리고, 차귀도와 와도가 눈앞에 펼쳐진다. 미세먼지와 흐린 날씨로 섬을 또렷하게 볼 순 없었지만 가끔은 흐릿하게 보이는 것도 좋다. 조금 더 걸으니 와도가 하트처럼 보인다. 그리고 '함 와도' 하는 것 같다. 그래 또 올게.  



오후 3:30 12코스 종점에 도착, 3시간 52분 동안 17.43킬로를 걷다.  



숙소로 오니 5시가 조금 넘는다. 오는 길에 채끝등심이랑 버섯을 사 왔다. 샤워하고 채끝에 버섯, 그리고 맥주 한잔 하니 여기가 천국이다. ㅎㅎ  



그래도 오늘 코스 넘 일찍 끝나고 넘 일찍 집에 오니 어색하긴 하다. 내일은 좀 더 걸어야겠다.  


P.S.

12코스는 길이도 적당하다. 무릉외갓집부터 중반까지의 밋밋함은 수월봉을 내려오면서부터 극적 반전을 이룬다. 엉알길에서 영겁의 시간과 곡선의 미학을 느꼈다면, 당산봉에서는 차귀도와 와도를 조망하면서 쉬엄쉬엄 내려온다.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올라오는 첫 올레길은 이렇게 반전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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