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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15. 2021

18 퇴사 그리고 올레길

20210331

퇴사 그리고 올레길

(16코스, 15.8킬로, 고내포구-광령1리사무소)


새벽 2시에 겨우 잠들었다. 서준용과의 진한 술자리도 있었는데 왜 그리 잠이 안 오던지. 그리고 6시에 눈이 떠지다. 그래 오늘이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이지. 3년 전 왔던 LINE도 이젠 안녕을 고해야 되네.


퇴사 소식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일부터 했다. 그리고, 임직원들에게 퇴사 메일을 올렸다. 한국 직원들 먼저, 그리고 일본 직원들에게는 번역해서 따로 보냈다.  




[페이스북 게시 글]


퇴사


제가 3년간 열정을 쏟았던 LINE을 오늘자로 퇴사합니다. LINE의 신중호 대표님이 2018년 3월 중순 포스코 사거리 뒤편 어느 허름한 호프집에서 라인에 와서 블록체인 사업을 맡아 달라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 지나갔습니다.


백수로 있다 라인에 와서 과분하게 토큰 컨설팅 조직인 언블락(Unblock), 블록체인 투자법인 언블락 벤처스(Unblock Ventures), 그리고 암호화폐 LINK(LN) 발행법인인 LINE Tech Plus까지 3개 법인의 대표를 맡았습니다.


2018년 9월 초 사내 워크샵에서 LINK의 시총 일조 만드는데 일조하겠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는데, 상장 시초가 $5이었던 LN은 퇴사하는 오늘 $200로 40배나 상승하였고, 시총도 $1.2B으로 1조 원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4년 전 2017년 10월에는 내가 만든 VC인 코그니티브를 나오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로 훌쩍 떠났는데, 이번엔 3월 중순부터 제주에서 머물며 올레길을 걷고 있습니다. 오늘도 역시 걸을 것입니다. 걸으며 비우고 걸으며 다시 채워 나가려고 합니다.


앞으로 회사 생활을 다시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를 외치기엔 아직 조금 이르니 뭔가는 하겠지요. 아마도 김우석(unblock과 LINE Tech Plus 후임 대표) , 방역주(스프링캠프 투자심사역) 같은 제자를 키워내는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일단 5월 말까지 제주에 머물며 올레길 완주하고(현재는 절반 정도 걸음) 그 이후는 책을 한 권 써볼까 합니다.


백수로 왔다 백수로 다시 돌아갑니다. 마지막 자작시 하나 올립니다.


나는 백수로소이다


나는 백수로소이다

조선 땅에 태어나

남의 시선 의식 않고

자유롭게 떠나고

지 멋대로 살다

결국 빈 손으로 돌아온

난 백수로소이다


나는 백수로소이다

재미를 쫓아

그것 만을 위해 살아온

그게 전부인 줄 아는

자유인 인척 우기는

나는 백수로소이다


매일 술을 마시고

무거운 배낭을 메며

뙤약볕 아래

먼지 자욱 자갈길을

발가락 물집과 함께

걷기만 하는

나는 백수로소이다


돌아가도 돌아갈 데 없는

나는 순례하는 백수로소이다




그리고, 곰탕 국물로 만둣국을 만들어 먹고 느지막한 12시에 고내포구 행 버스에 오른다. 오늘은 제주시 근처를 걷는 코스라 버스로 이동한다.  



12:40부터 걷기 시작한다. 날은 매우 흐리고 미세먼지가 극도로 좋지 않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어제 먹은 술이라도 깨려면 열심히 걸어야 한다.


애월까지 계속 해안길이다. 그래도 딱딱한 시멘트나 아스팔트 길이 아닌 도로 옆길이다. 걷는데 페이스북 댓글이 계속 달린다. 친한 몇 분께는 미리 퇴사 소식을 알렸는데 대부분은 놀랐을 것이다. 퇴사 전에 바로 제주 내려가서 올레길 걷는 것도 놀랐을 것이다. 툭하면 회사 관두고 산티아고로 떠나고 걷기만 한다니 참 별놈이다 생각했겠지. 만나자는 연락도 빗발친다. 그냥 답장 없이 묵묵히 걷는다.



오후 2시 가까이 오면서 배가 고파진다. 두 중년의 커플이 지나간다. 내가 입은 산티아고 티셔츠를 보며 즐거워한다. 본인도 똑같은 티셔츠 있다면서. 부엔 까미노, 즐거운 올레길 되시길.  


오름(수산봉) 하나 오르고 헉헉대다. 1시간 40분 걷고 오름에서 처음 쉬다. 라인 메신저 임원 채팅방에 신중호 대표님이 먼저 퇴사 소식을 알리셨다. 수산봉에 오르고서야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 채팅방에 감사 및 퇴사 인사드리고 '나는 백수로소이다' 시를 올렸다. 그리고, 그 방을 탈출했다.



계속 걷는다. 시가 곳곳에 있는 마을을 지난다. 마을 곳곳에 큰 돌에다가 시를 새겨 넣었다. 그중 눈에 띈 시가 바로 '어느 날 하느님이'라는 박의상 시인이 쓴 시다. 난 언젠가 이런 함축적인 시를 쓸 수 있을까?



고려시대 삼별초 항몽 유적지에 이른다. 이 곳은 삼별초의 최후 항전지 항파두리성이다. 더 느끼고 싶은데 해안가 고내포구에서 중산간 지역으로 계속 오르막이라 힘들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진다. 어제 술독이 마구 빠지는 듯하다.  



유채꽃이 활짝 핀 항몽 유적지 인근을 지나니 중간 스탬프 찍는 곳이 있다. 앗! 올레 패스포트가 없다. 어디 있을까? 잃어버렸을까? 우얄꼬. 이미 올레길 절반 정도 스탬프 찍은 패스포트인데. 슬프다.  



오후 4:45분에 16코스 종점인 광령1리에 도착한다. 오늘  3시간 43 동안 16코스 16.16킬로를 걸었다. 이거 숫자가 아름답다. 일부러 '16' 맞추려고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근데 미세먼지 땜에 하루 종일 마스크  걸으니 두배는 힘드네. .  



P.S.

16코스는 해안가 고내포구부터 해안길을 걷다 계속 오르막으로 중산간 지역으로 올라가는 코스이다. 애월 해안가를 벗어나면 오름이 하나 있고 그 뒤에 항몽 유적지와 작은 마을들이 계속 나온다. 역 방향으로 걸으면 내리막 길이라 쉬울 수 있으나 정 방향은 생각보다 힘들다. 오늘 오르막이 있으면 내일 내리막이 있고, 그리고 아픈 역사를 간직한 항몽 유적지가 있는데 이런 고통은 견딜만하다 하고 생각하면 맘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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