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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22. 2021

26 AI로 만난 인연

20210408

AI로 만난 인연

(2코스, 15.6킬로, 광치기해변-온평포구)


7:40 기상. 이틀째 연속으로 먹는 가브리살, 오늘은 유독 느끼하게 느껴진다. 어제 저녁에 흑돼지 오겹살을 먹어서 더 그런 듯하다. 9:45에 집을 나선다. 조금 구름이 끼어있다.



선크림을 바르는 데도 얼굴은 꽤 탔다. 근데 아무것도 안 바른 귀는 거의 깜장 숯덩이 수준이다. 그래서 오늘 처음 귀에도 선크림을 바른다. 왜 등산모 안 쓰고 다니냐구? 일단 넘 아저씨 같고 해안가라 바람이 넘 세서 불편하다. 두건이 훨 올레꾼스럽다 ㅎㅎ


11시 무렵 온평포구에 주차하고 2코스 출발점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택시가 출발하는데 저 멀리서 어제 만난 형님이 종점으로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도대체 아침 몇 시부터 걸은고얏! 대단하다.


11:15에 2코스 출발점에서 출발하다. 아침에 다시 보는 성산 일출봉은 또 다른 느낌이다. 날이 좀 흐려서 그렇지 일출봉은 역시 아침에 보는 게 제맛인 듯.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간다. 그 방향으로 가면 광치기 해변 앞 호수(내수면)를 끼고 시계방향으로 돌아야 하는데 다리 공사로 통행이 안된다. 부득이 역방향으로 돈다. 뭐 어떻게든 돌면 되지. 이 내수면을 돌려고 온 건데. 근데 가다 보니 내수면 코스로 파란 화살표가 놓여 있다. 올레 홈페이지에도 안 바뀌어 있었는데 언제 원래 코스를 복원해 놓은 거지?


근데 가다 보니 좀 전에 다리가 안 막혔다면, 만약 그리로 갔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리로 무작정 관통했다면 5킬로는 줄어들고 너무나 멋진 내수면의 풍경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


내수면 둑방길을 건너 호수를 돌다 작은 언덕에 오른다. 단순 호수 둘레길이 아니다. 그래, 여긴 원래 호수가 아니었지. 새마을사업 한다고 방파제 만들면서 양어장으로 쓰던 곳이었지. 그러니, 원래 언덕도 있고 오름도 있는 거겠지. 양어장은 없어지고 물만 가득하니 이것도 일출봉과 더불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네.   



쌍월(雙月), '매일 아침 하나의 해가 뜨고, 매일 저녁 두 개의 달이 뜬다. 여기 내수면은 달이 뜨면서 바다에 비치는 달까지 두 개의 달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란다. 어제 광치기 해변의 일출봉 아래에서 이 내수면으로 지는 해를 바라봤지. 좀 더 있다가 달이 뜨는 것도 봤어야 했는데 아쉽구먼.


쌍월이라 하니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이 생각난다. 월하독작 중 내가 좋아하는 구절을 바로 아래에 인용한다.



월하독작(月下獨酌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舉杯邀明月(거배요명월)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밝은 달 맞이하니

그림자 비쳐 셋이 되었네.

[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바다에도 달이 호수에도 달이 그리고 술잔에도 달이. 그럼 쌍월이 아니라 삼월(三月)인데. 아냐, 벌써 사월이야. 4월 하고도 8일.



왜구가 쳐들어 왔을 때 군량미를 쌓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는 '식산'봉, 오르는데 '삭신'이 쑤신다. 식상한가? ㅎㅎ 오르는데 정상을 앞두고 우회하게 되어 있다. 삭신이 쑤시며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식산봉 정상은 찍어야 하지 않겠나. 조금 다 오르니 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역시 오르길 잘했다.



내려오면서 보니 수백 년은 된 듯한 소나무가 즐비하다. 곶자왈 느낌의 나무들도 많이 있다. 여긴 유독 생태계가 훼손 안된 듯싶다. 그리고, 호수를 계속 돈다. 아기자기하다. 호수에서 보는 일출봉의 느낌은 또 색다르다. 호수 사이로 데크로 산책로도 잘 만들어 두었다. 갈대 무성한 습지를 지나니 호수 둘레길도 거의 마무리된다. 이걸 안 보고 갔으면 후회했을 것이다.



오후 12:57에 한 식당에 점심 먹으러 들어오다. 백반정식은 8천원인데 가성비 훌륭했다. 제육볶음, 오징어볶음, 갈치구이 등에 각종 나물도 다 훌륭하다. 어찌 막걸리 한잔 안 할쏘냐 ㅎㅎ 맛있게 먹은 후 1:30에 다시 출발하다. 구름은 걷히고 햇살은 뜨겁다.



나오다 식당 앞 중간 스탬프 지점에서 한 여성분을 만났다. 그냥 지나치시길래 스탬프 안 찍냐고 물어보니 이미 찍었단다. 그분 걷는 속도가 제법 된다. 날 피하는 걸까? 나도 속도를 높인다.


눈 앞에 놓인 대수산봉도 가파르다. 이 오름 오르기 전 그 분과 한참 올레길 얘기하다 길을 두 번 잃다. 얘기에 빠져 정신줄 놓는구나. 그래도 혼자 걷다 함께 얘기하면서 걸으면 힘이 난다. 그분이 조금 뒤처지는 것 같아 나도 속도를 늦췄다. 오늘 코스가 15.6킬로로 그리 길지 않으니 천천히 가지 뭐.



대수산봉에 오르니 일출봉, 지미봉, 저 멀리 우도, 오늘 걸은 내수면과 식산봉, 저 오른쪽 아래 섭지코지가 보인다. 같이 걷는 여성분이 맥주를 꺼내더니 한 모금 먹으란다. 캔이 작아 아주 조금 마시고 다시 건넸다. 그리고, 조금 있다 한 모금 더 먹으란다. 난 그분이 배고플 것 같아 구운 계란과 약과도 줬는데 ㅎㅎ


정상에서 서로 사진도 찍어준다. 그리고 더 얘기를 이어가는데, 이 분은 AI(조류독감) 때문에 내수면 코스가 막혔다고 안내받고 내수면 호수를 돌지 않고 바로 오신 분이다. 이렇게 만나려면 만나게 된다. 굳이 AI(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고 하늘을 나는 새들(조류독감)만 조금 거들면 된다.



대수산봉에서 내려와서는 나지막한 경사의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푸름이 우거진 외딴 길, 이름 모를 꽃들과 돌담 사이를 여유롭게 걷는다. 내 입도 계속 떠들어 댄다. 물집 대처하는 법, 산티아고 순례길 얘기, 회사 관두고 올레길 걷는 얘기 등등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이 분도 회사 1년 휴직하고 제주에 내려왔다네. 근데, 올레길 걷는데 신발이 편한 트레킹화나 운동화가 아니다. 헉, 뭐지? 그러고도 오늘 21코스와 2코스를 하루에 걷는단 말인가? 지미봉이 있는 21코스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코스인데, 난 그거 걷고 거의 녹초가 되었는데.


나에게 뭐하는 분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작가라고 했다. 올레길 걷는 얘기도 매일 글로 쓰고 았다고 했더니 그럼 오늘 얘기는 ‘AI로 만난 인연’으로 제목 하면 되겠네 하신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네. ㅎㅎ


내가 글 쓰는 브런치 얘기도 했더니 링크 보내 달란다. 덕분에 전화번호가 확보된다. 이름을 ‘2코스 조류독감’으로 저장했다. 다 AI 덕분이다.



2코스 종착지인 온평포구로 들어서기 전 혼인지를 지난다. 탐라국의 시조와 벽랑국의 공주가 만나 혼인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이곳은 연못이 참 아름답다. 연못 수면에 비친 자연도 멋지다. 그곳을 지나니 마을 입구가 나오고 한참을 내려가니 해안가에 외롭게 간세가 있다.


오후 4:19 도착. 4시간 6분 동안 16.95킬로를 걷다. 조류독감 그 분과는 이별을 고했다. 또 한 번 새들이 도와주면 만날 수 있겠지.



차를 몰고 서귀포로 향한다. 서울서 친한 과친구가 내려와서 연락을 한 거다. 또 한 명의 친구 은익이랑 함께 말이다. 친구 은익이가 예약해둔 서귀포 ‘금바리’로 들어서니 친구들이 와 있다. 바로 시원한 사이다 한잔 하다.


회가 나오는데 나의 최애집 ‘어느 멋진날’의 김진태 사장님도 들어오는 게 아닌가? 아, 며칠 전 우석이 다녀갈 때 거기서 엄청 마셔 대었지. 나오기 전 화장실에도 갔는데 비틀거리다 변기에 앉았다 그만  양생 중인 변기를 망가뜨렸는데. 원래는 다시 ‘어느 멋진날’가서 사죄하고 보상하려 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사죄드리고 사장님이 극구 마다하셨지만 바로 현장에서 보상했다.


30년 친구들을 제주에서 보다니. 다들 잘 큰(내가 키가 제일 작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니, 그것도 제주에서 하니 참 좋다. 회도 튀김도 뼈국도 좋았지만 더 좋은 건  서로 욕하고 막말한 우리들의 함께한 시간 아니었을까. 회천이도 은익이도 고맙다. 아직도 다금바리의 무지개 빛깔을 잊을 수 없다. 그 쫀득한 식감도.



유붕이 자원방래 했는데 그 붕이 술까지 샀다. 불역락호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회천이 왈 은익이는 뱃사람 다 됐고. 난 산적 같단다. ㅎㅎ


참치양식히는 친구 은익이가 담주에 생참치 해체하니 한번 와보라 한다. 고맙다. 담주에 꼭 가보련다.


대리 불러 제주로 돌아오는 길이 맘도 몸도 편하다. 잠깐 차 안에서 졸았는가 싶었는데 제주시에 도착이다. 대리비 6만 원이 결코 아깝지 않은 하루였다.


P.S.

2코스는 1코스와 감정선이 연결되어 있다. 1코스의 중심인 일출봉을 쉽게 보내지 못하고 내수면을 돌면서 보고, 식산봉에 올라서도 보고, 호수 건너편에서도, 그리고 대수산봉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일출봉과 이별한다. 대수산봉부터는 온평포구까지 그리 힘들지 않은 낮은 내리막이다. 1코스의 여운을 2코스의 전반부까지 느끼고 대수산봉을 기점으로 일출봉을 떠나 제주의 새로운 자연을 접하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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