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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20. 2021

25 잇다 - 단절된 듯 연결된 올레길을 열다

20210407

잇다 - 단절된 듯 연결된 올레길을 열다

(1코스, 15.1킬로, 시흥리정류장-광치기해변)


어제의 무리로 9시 넘어 일어나다. 오늘 아침은 가브리살과 두부 부침이다. 이건 6시간 동안 28킬로를 걸으며 고생한 나를 위한 작은 선물이다. 두툼한 가브리살 맛도 훌륭했지만 그 돼지기름으로 지진 두부도 참 맛났다. 친구 은익이가 준 깍두기도 이제 바닥을 보여간다.   



1시간을 넘게 운전해 성산 일출봉이 보이는 광치기 해변에 도착하다. 그리고 택시로 이동해서 11:45에 올레 1코스 출발점에 도착하다. 여기도 표지석 외에 아무것도 없다. 어제 21코스 종점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空手來 空手去(공수래 공수거)',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그걸 의도하고 1코스와 21코스 설계를 한 것인가? 21코스는 표지석도 안내소도 없고, 1코스는 1킬로 더 가야 올레 안내소가 있으니. 버스 정류장만 있을 뿐 거리가 휑하다.



1코스 스탬프를 보관하는 간세를 보니 카카오가 후원한 것이다. 음, 역시. 다음(Daum)과 합병하고 나서도 카카오 본사는 제주에 잠시 있었지. 상징성 있는 1코스를 카카오가 후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 나도 다 걷고 후원할 예정인데, 몇 코스가 좋을까? 이것 또한 욕심이다. 공수래 공수거인데. 아무 조건 없이 후원해야겠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오후 12:53에 출발하다. 방금 전 도착한 커플은 여기가 올레길 첫 시작인가 보다. 올레 패스포트가 없어 스탬프 못 찍고 올라간다.  



첫 리본이 보인다. 그리고, 돌담을 따라 1킬로 올라오니 안내소가 나온다. 안내소에 들러 두건도 하나 샀다. 좀 전 커플을 보니 패스포트 사고 바로 올라간다. 그런데 계속 직진이다. 파란색 화살표도, 리본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오른쪽 길이라고 알려줬다. 그리고 오름을 올라가는 데 물도 없다고 하소연한다. 아니 물도 없이 올레길을 출발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물도 한병 줬다.  


보통은 7코스를 남겨두고 완주한다고 한다. 남겨둔 7코스나 7-1코스를 마지막에 걸으며 종점인 서귀포에 있는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들러 인증서와 완주메달을 받는다고 한다. 그걸 모르고 7코스를 남겨둔 거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선견지명이 있었던 듯. ㅎㅎ



초반부터 오름을 오른다. 잠시 오르니 시야가 트인 곳이 나온다. 저 멀리 일출봉과 이름 모를 오름이 보인다. 어제 걸었던 인상 깊었던 지미봉도 보인다. 그 언덕 중턱에 '알오름'을 알려주는 간세가 있다. 그리고 좀 더 오름을 오른다. 첫 땀을 흘릴 때까지가 여전히 힘들다. 첫 땀 흘린 이후부터는 몸에 탄력이 붙으니깐.



오름 이후에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작은 숲도 지나고 마을도 지난다. 많이 봐서 익숙한 풍경이다. 종달리 마을로 들어간다. 1코스가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고 들었는데 마을 곳곳에 올레길을 알리는 간세가 보인다. 한적한 시골 골목 분위기가 느껴진다. 종달리는 제주 최초의 염전이 있었던 곳이다. 한때 종달 염전의 소금이 최고로 쳐주는 시절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서 역사의 흔적을 알려준다. 저수지에는 오리들이 노닌다. 그 사이로 학도 한 마리 날아간다. 재네들도 여기가 염전터였다는 것을 알까?



해변으로 나온다. 걷다 보니 어제 걸었던 21코스 종점이 보인다. 이렇게 교차되는구나. 그래, 끝은 시작이고 시작하면 끝이 보이지. 이렇게 살짝 크로스 하면서 1코스는 21코스를 만나지.  



물 빠진 종달 해변에 외롭게 떠 있는 섬 같은 일출봉이 보인다. 물이 차 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이건 완전 육지와 단절된 고립된 섬 느낌이다.  



'어서 오십시오'라는 서귀포시 표지석이 보인다. 종달 해변은 제주시 구좌읍이다. 이 해변을 걸어서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들어가는구나. 이렇게 1코스가 제주와 서귀포를 잇는구나. 묘하다.


그런 느낌을 느끼며 계속 시흥리 해안도로를 걷는다. 그러다 오후 2:45에 중간 스탬프 찍는 목화휴게소에서 사발면, 쥐포에 맥주 한잔 하다. 물 빠진 바다를 보며 맥주 마시는 것도 느낌이 다르군. ㅎㅎ


어제 지미봉의 감동이 커서인지 오늘은  정도는 아니다. 오름 2  이후는 종달리를 거쳐 종달 해변과 시흥리 해안도로를 지나 성산항 쪽으로 오고 성산 일출봉을 앞에 두고 크게  한번 그리고 광치기 해변으로 나오겠지. 그냥저냥 같은 코스가 아닐까? 그래도  올레길 생긴 코스인데.



근데 그게 아닌 거다. 완전 오판이었다. 여긴 올레 시작 1코스가 아닌가? 일출봉을 향해가는데 처음엔 성산항의 분주함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성산 갑문을 지나 코너를 돌면서 보이는 풍경이 장난 아니다. 바다를 끼고 작은 언덕을 오르니 눈 앞에 일출봉이 보이는데 그게 장관이다. 좀 전 다리에서 만난 택시기사 하시는 형님과 서로 얘기도 주고받으며 걷는데 넘 좋다.   



일출봉은 유료라 들어가진 않는다. 지금은 그 앞을 지나치지만 추후 반드시 너를 찾으리. 멋 모르고 올랐던 일출봉을 그땐 제대로 느끼며 오르리라.


그렇게 일출봉과 이별을 고하고 광치기 해변을 걷는다. 해변 중간쯤에 있는 1코스 종점에 4 53 도착했다. 3시간 26 동안 15.08킬로를 걷다. 그리고, 한참을 멍하니 일출봉을 바라봤다. 뒤를 돌아보니 해가 려한다.    남긴다.  




성산에서


너는 왜 뚝 떨어져 혼자 있는가

아주 가는 끈 하나만 이어져

육지라는 제주섬에 미련을 두려 하는가


검은 해변과 검은 돌

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를  

내려보며

해를 처음 맞는다는

그 미련남은 일출봉 아래에서

난 저 육지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주석기 형님, 안산에서 개인택시 하신다는 데 오늘 저녁도 사주신다. 무려 제주 흑돼지 오겹살. 일출봉 보이는 전망의 고깃집에서 소주잔 따라드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오늘 21코스와 1코스 두 코스 걸으시느라 1코스 막판에 무지 힘드셨는데 나 만나고 얘기하면서 걸어서 넘 고마웠다고 하신다. 나도 인생 얘기하면서 걸어서 넘 좋았는데. 방금 전 쓴 시도 읽어드리니 바로 작가님으로 호칭이 바뀐다. ㅎㅎ



나와서 일출봉을 보며 광치기 해변을 한참 서성거렸다. 바람이 살랑 불면서 해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나도 광치기 해변과 일출봉에서 흔적을 감춘다.  



P.S.

올레길 중 가장 먼저 열린 길이 1코스다. 1코스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고, 마지막인 21코스와 시작하는 1코스가 교차하고, 바다에서 일출봉의 일출과 내수면 호수의 일몰이 교차한다. 단절된 듯 연결된, 그래서 제주를 하나로 잇는 올레길의 탄생을 알린 코스가 바로 1코스다. 오름으로 시작하여 바다로 끝나는데 이것도 제주 올레길의 상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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