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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18. 2021

24 하루 두 코스에 도전하다

20210406

24 하루 두 코스에 도전하다

(20코스, 17.6킬로, 김녕서포구-제주해녀박물관)

(21코스, 11.3킬로, 제주해녀박물관-종달바당)


7:30에 일어나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9시에 집을 나선다. 발가락에 밴드가 이젠 8개다.  



오늘은 20코스, 21코스 두 코스를 걸을 거다. 운전해서 오다 당초 주차 목적지인 21코스 종점 종달항에서 20코스 출발점인 김녕서포구로 긴급 변경하다. 최소 7시간은 걸어야 되는데 종달항까지 갔다가는 출발점으로 택시 이동까지 포함해서 11시 넘어 출발할 것 같다. 그러면 6시에나 도착할 텐데 혹시나 지연될 경우 어두워질 것 같은 우려가 있어서이다. 21코스 마지막에 오름도 하나 오르는데 어두우면 낭패거든.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물 한 모금 마시고 20코스 출발점인 김녕서포구에서 10:07에 출발한다. 날이 넘 좋다. 거의 모든 발가락에 밴드를 붙이다 보니 이젠 발가락도 편하다. 특히 어제 잡힌 새끼발가락 물집이 따끔거리지 않아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성세기 해변을 끼고 해안가로 돈다. 가까이에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푸른 바다와 하얀 바람개비의 조화도 괜찮다. 바다 위 하얀 요트, 요트는 왜 대부분 하얀색일까?



바위 위에 자라는 잔디, 그리고 이쁜 꽃. 모진 바람과 뿌릴 내릴 곳 없는 곳에서도 자라는 끈질긴 생명력. 나는 어떤가?


해안도로 옆 길로 계속 걷는다. 전기차 충전소 이름이 e-Gogang이다. 이름 한번 괜찮네. ㅎㅎ 아 배고팡.  



언덕을 오르고 내려오면 월정리 마을이다. 골목길 찻집, 공예품 샵, 서점 등이 특색 있다.  



한 농부가 당근을 수확한다. 급 당근이 먹고 싶어 져 아침에 싸온 걸 꺼내 먹다. 구좌읍에서 생산한 바로 구좌 당근, 어떻게 이리 단단하면서도 수분도 많고 단맛이 나는지. 구좌는 밭에 모래가 많아 당근 재배에 제격인 토양 같다.  



월정리 해변에 들어선다. 후배 승태에게서 전화 온다. 산방산 근처에 가족여행 왔는데 형 생각나서 전화한 거란다. 나에게 머리는 많이 식혔는지 묻는다. 그래 많이 식히다 못해 얼기 직전이다. ㅎㅎ 


너무 정신없이 걷느라 중간 스탬프 지점을 모르고 지나치다. 하루 두 코스 간다는 압박감이 컸었던 것 같군. 올레는 놀멍 쉬멍 걸어야 하는데 내가 오히려 서두르다니. 흑.  


14킬로 지점에서 맛나 보이는 당근 케이크, 당근 주스 사진을 크게 걸어 놓은 카페를 지나쳤다. 넘 먹고 싶어 돌아갈까도 생각했는데 오늘은 바쁜 일정이라 맘이 다 급하다. 일단 20코스 도달하면 당근 케이크는 꼭 먹을 거다.  


오후 1:37에 20코스 종점에 도착하다. 11:07에 출발하여 한 번도 안 쉬고 3시간 30분 동안 17.33킬로를 걸은 거다. 1킬로당 랩 타임 12분 07초를 끊다. 시속 5킬로 정도로 계속 걸었더니 발바닥에 불났다. 좀 먹으며 쉬고 다시 21코스로 출발해야겠다.  



9코스 대평항에 있는 박수기정 얘기를 20코스 안내소 선생님으로부터 듣다. 박수기정은 바가지로 마실 샘물이 솟는 절벽이란 뜻으로 절벽 아래로 가다 보면 물 나오는 곳이 있단다. 본인은 그곳까지 걸아가서 봤다고 한다.


이 선생님도 작년 5월 산티아고 행 항공권을 예매했다 강제 취소당하셨다네. 나도 그랬는데. 올레길 걸으신 분들은 산티아고를 다 꿈꾸고, 산티아고를 걸었던 분들은 지금은 코로나로 스페인에 못 가니 올레길을 걷는다. 다 공통점이 있다. 하긴 올레길도 산티아고를 다녀오신 분이 그 영감으로 제주에 만드신 길이니.  


그 선생님께 올레 코스 중 어느 코스가 제일 좋았냐 여쭤보나 서귀포에서 출발하는 7코스가 최고라 하시네. 그래, 내가 아직 걷지 않고 남겨둔 코스지. 근데 비올 때는 올레길 걷지 말라고. 신발도 무거워지고 오름도 미끄럽고 다 힘들다고 ㅎㅎ


달달한 약과 몇 개와 양갱 한 개 먹고 양말 벗고 불난 발 좀 식히다 2:15에 21코스로 출발하다. 21코스는 음악을 틀고 여유 있게 걷는다.  


그래도 20코스를 고생하며 걸어서인지 산티아고 느낌이 좀 난다. 20코스 종점 마지막 1킬로를 남기곤 물집도 조금 아리고 발바닥 경련이 나서 조금 힘들었거든. 그리고, 올레길 걸으면서 처음으로 양말까지 벗고 발 식히는 것도 해보고. 잠시 쉬고 출발할 땐 잠시 쉬며 경직된 근육이 풀리기 까진 절뚝거리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산티아고 순례길 경험과 유사했다. ㅎㅎ



돌담길 옆으로 밭이 있는데 다 무밭이다. 그중엔 밭을 통째로 갈아엎은 곳도 보인다. 경기가 나쁘긴 한가 보다.  


봄바람도 살랑살랑. 하도의 별방진 성터도 아름답다. 마을 전체가 성 같다.  



중간 스탬프 찍는 곳에 리치 망고 가게가 있어 망고 쉐이크를 먹다. 이 맛은 찐이다. 망고만 100%다. 당근주스의 한을 망고로 대신 풀다. ㅎㅎ



망고 주스를 먹고 나오는데 중고폰 매매 서비스 중가비의 장영석 대표가 카톡으로 리치 망고 쿠폰을 선물해 준다. 아까비. 조금만 빨랐어도 ㅎㅎ. 그래도 고맙다. 걷다 보면 또 리치 망고가 나오겠지.  


하도해수욕장에 방송 촬영이 한창이다. 걸으며 보니 가수 비가 촬영을 하고 있다. 저 멀리 우도가 보이고, 얕고 잔잔한 바다가 인상적이다. 맑은 날이라 색깔도 아름답다. 하도 해변 옆 호수도 햇빛이 반사되어 장관이다. 오늘은 유독 바다 색깔이 곱다.  



아까 사진 찍으면서도 오늘 오르는 마지막 오름이 저 오름이 아니겠지 했는데 어찌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네. 25킬로를 걸어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몸인데 160미터 오름이 웬 말이냐. 그것도 정상까지 내리막이나 평지 한번 없는 오르막이다. 흑. 계속 오르막이다 보니 뒤꿈치가 뽀사질 것 같다. 21코스가 11.3킬로인데, 다 코스가 짧은 건 이유가 있다니깐. 흑.  


그래도 20분을 계속 오르니 정상이다. 와우 360도로 다 보인다. 21코스 올레 안내소 선생님이 21코스는 밭도 돌담길도 있고 해안길도 있고 오름도 있는 짧지만 올레 코스 최고 중 하나라고 하셨는데 정말이다. 우도, 일출봉, 하도 해변, 저 멀리 한라산까지 다 보인다. 바로 아래 아기자기 한 밭과 형형색색의 집들도 넘 이쁘다. 와우 하고 탄성을 계속 낸다. 시야가 탁 터지고 주변 풍경이 아름다운 지미봉에서 한참을 머무르다. 거기서 경치를 즐기고 있던 한 올레꾼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아저씨도 지미봉과 하도 해변이 최고란다. 이런 전망과 물빛은 본 적이 없다고. 그 아저씨는 더 감상에 잠겨 있을 듯, 난 먼저 떠난다.



두 코스 다 걸었지만 뿌듯함보다는 여유 있게 즐기지 못한 후회가 더 크게 다가온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지미봉을 터벅터벅 터벅터벅 내.려.온.다.


오후 5:27에 21코스 종점에 도착하다. 20코스와 21코스 두 코스를 총 6시간 14분 동안 걸어 28.16킬로를 오다. 이건 오바다. ㅎㅎ



반겨주는 이 없는 21코스 종점, 1코스부터 시작한 올레꾼도 제법 있을 텐데 오직 찬 바람만 불어주네. 올레 표지석도 안내소도 없는 외로운 21코스 종점. 흑. 바다에 가 보았더니 그곳은 더 이상 바다가 아니었다는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같은 곳. 여기서 바람만 실컷 맞다.  



올레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다. 이게 마지막 페이지다. 한 장 더 넘길 수 있어 넘겨보니 ‘폭삭 속았수다’라고 적혀있다. 흑. 다시 아래를 보니 제주도 사투리로 ‘정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라네. 바다와 인접하고 인적도 드문 이곳에 담배꽁초만 쌓여있다. 버스 타는 곳 까진 17분을 더 걸어야 한다.  



한참 멍하니 바람만 더 맞다. 지금 내가 기댈 곳은 카카오 택시밖에 없다. 흑.  


택시 기사분이 작년에 완주하셨다는데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 1코스는 아침 일찍 걷기 시작해서 성산포 도착해서 배 타고 우도 코스(1-1코스) 돌고 1코스 마무리하면 하루에 1코스와 1-1코스를 다 돌 수 있다고 하신다. 그리고, A/B 코스는 두 개 중 하나만 걸어도 완주 메달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신다. 추자도도 긴 코스라 일찍 출발해서 열심히 돌고 와야 마지막 배를 탈 수 있다네.  


오후 6:17에 김녕서포구에 도착하다. 이제 한 시간을 운전해서 제주시로 가야 한다. 으악.  


P.S.


20코스는 김녕서포구부터 시작해서 김녕 해수욕장, 월정 해수욕장, 평대 해수욕장, 세화 해수욕장을 지나는 해안길 코스다. 그만큼 길이 딱딱하단 얘기다. 그렇지만 가끔 밭도 지나고 이쁜 마을도 지난다. 특히, 당근 밭을 많이 지나는 것을 보고 여기가 구좌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근으로 유명한 동네이기 때문에 당근을 먹으며 걸으면 더 좋은 듯하다. 혹시 차를 가지고 간다면 20코스 종착지인 제주해녀박물관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으니 그곳을 이용하면 좋다.  


21코스는 짧지만 강렬하다. 마을과 밭길, 바닷길, 오름이 1/3 씩 잘 배치되어 있어 짧지만 제주 올레길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에 있는 지미봉은 강렬한 만큼이나 21코스의 마지막이자 1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물로 그 의미가 크다. 지미봉에 오르면 일출봉, 우도, 식산봉, 종달해변, 하도해변이 한눈에 들어오고 봉우리 아래 아름다운 밭 풍경도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걸었던 최고의 올레길이 아닌가 싶다. 아, 또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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