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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17. 2021

23 아무 잡념도 없다

20210405

아무 잡념도 없다

(19코스, 19.4킬로, 조천만세동산-김녕서포구)


아침 8시 기상, 똑같은 루틴., 재즈와 커피.


10시에 집을 나서 김녕서포구에 주차하다. 다시 택시를 타고 19코스 출발점인 조천만세동산에 도착한다. 그리고, 11:20에 출발한다. 비 온 뒤라 미세먼지도 없고 날이 참으로 화창하다.


조천만세동산을 관통해서 밭들과 돌담 사이로 내려오면 해안가다. 해안가 둘레로 환해장성이 쌓여있다. 첨엔 그냥 돌담으로 알았었는데 이 장성이 제주도 해안 둘레로 300리나 쌓였다고 하네.



내려온 해안가에서 바라본 신흥리 백사장과 오름은 또 다른 느낌이다. 그 해안을 따라 신흥포구에서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 입구 큰 나무 아래 이팝나무 자생지라고 적혀있다. 조팝이 아니라 이팝이다. 갑자기 조껍데기 막걸리가 땡긴다. ㅎㅎ



작은 연목 옆 산책로에 올레꾼이 모여 얘기하고 있다. 나도 다가가 보는데 작은 물고기들이 제법 많다. 거기 계시던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쟤네들도 대장이 있나 봐. 한 놈이 가면 다 줄지어 따라가거든’.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도 자신이 선두에 서서 리본이나 화살표  발견하며 가는 것보다 앞 순례자 꽁무니 따라 가는 게 편한데 ㅎㅎ


마을 골목과 밭을 지나가면 다시 해안가로 나온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함덕해변과 서우봉. 좀 전에 본 오름이 내가 이번에 제주 와서 처음 오른 그 오름이 맞았던 거다. 저기 카페 델문도도 보인다.



12:45분, 서우봉을 앞두고 식당에 들어왔다. 날이 넘 좋아 함덕해변과 서우봉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고 싶었다. 흑돼지 두루치기가 먹고 싶었는데 2인분 이상만 된단다. 엉엉. 혼자 다니는 설움을 여기서. 아쉽지만 이번에도 문어라면이다.



6.81킬로 왔으니 1/3은 온 듯. 날도 좋으니 점심 먹고 느긋하게 걸어야겠다. 오늘 문어라면은 지난번 된장 베이스의 문어라면에 비해 라면수프로 끓인 거다. 오히려 어설픈 수제 된장 수프보다 라면 본연의 맛이 나는 게 좋다. ㅎㅎ



서우봉 시멘트 바닥 오르막 코스는 다시 걸어도 힘들다. 배가 부르니 몸이 무거워서 더 그런가 보다. ‘크허’하고 트림이 올라오는 순간 오르막은 멈추고 옆길로 빠진다. 방심도 잠시 다시 오르막이다. 그래도 나무계단이라 좀 전 시멘트 바닥보단 낫다. 오르막도 이내 끝나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내려가는 길은 기분 좋다.


파란 지붕 위 풍력발전소 바람개비. 저 멀리 한라산. 대나무 숲 사잇길.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 참 좋다.



아무 잡념이 없다. 원망과 후회도. ‘희우님, 임원 맞아요? 전혀 임원 같지 않아요. 어떻게 임원이 웃고 다닐 수 있냐. 사업과 직원 걱정에 불면증에 시달린다던다 하는 건 이해되는데’라는 전 보스의 충격적이었던 말도 이젠 아름다운 추억과 술 안주거리일 뿐.


머리가 너무 비워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고민도 없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무작정 걸으니 비워진다. 비워지고 아무것도 없으니   공간을 빠르게 채우고  또한 새로운 것에 쉽게 몰입하게 되지 않았을까. 산티아고에서의 비움이 새로운 블록체인 분야로의 도전을 가능하게 하였고 새로운 곳에 와서 조직을 만들고 블록체인 사업을  없이 펼칠  있지 않았을까. 이런 패턴을 알기에, 아니 믿기에 불안하지 않다.


식당에서 올레길 걸으시는 어르신 부부를 만났다.  보름 일정으로 오셔서 놀멍 쉬멍 걸으멍 하신단다. 오늘은 나와 같은 19코스. 즐겁게 걸으시라고 인사하고 오후 1:20에 다시 출발한다.



북촌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른 이후부터는 계속 어어지는 차도 옆길이다. 같은 차도 옆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올레꾼은 언제 멋진 길이 나타날까 더 기대를 하겠지만 산티아고 순례자는 즐기러 온 게 아니고 야고보 선생님의 고통에 동참하러 온 거라 그 시멘트 바닥의 딱딱함과 발바닥의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걷는다. 편한 방수 등산화와 기능성 등산복을 오히려 죄스럽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이번 길은 발바닥이 제법 아프다. ㅎㅎ


계속 걷는다. 소나무 숲이 나오고 동북리 마을 동네 운동장이 나온다. 여기 동네 운동장 클라스 좀 보소. 명칭 그대로 동네 운동장인데 천연 잔디구장이다. 후덜덜. 여기서 중간 스탬프 찍고 다시 출발한다. 오후 2:53분.



솔밭 사이로 거대한 바람개비가 보인다. ‘벌러진 동산’이란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 고즈넉한 숲 속, 여기도 좋다. 숲은 더 우거진다. 적막. 거대한 바람개비의 그림자가 숲길을 더 신비하게 만든다.



여긴 꼭 곶자왈 숲길 같다. 거의 오르막 내리막이 없는 숲길이면서 나무도 비슷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도 곶자왈이란다.



벌러진 동산부터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내려온다.


4:06에 김녕서포구 19코스 종점에 도착하다. 4시간 2분 동안 19.1킬로를 걷다.



올레 안내소가 없으니 쓸쓸하네. 반겨주는 분도 없고. 그래도 오늘 혼자 애썼다 희우.


P.S.

11코스는 함덕의 아름다운 백사장과 해변, 서우봉에서의 전망, 거대한 풍력발전소와 곶자왈 숲길, 다시 바다로 이어지는 코스다. 적당한 경사, 숲과 바다를 다 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코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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