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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23. 2021

27 길은 연결이고 스토리다

20210409

길은 연결이고 스토리다(자섭 형님과의 인연)

(3-B코스, 14.6킬로, 온평포구-표선해수욕장)


8:20 기상. 순두부찌개 양념에 연두부 듬뿍 넣어 순두부찌개를 해서 먹다. 계란 하나 동동 띄우니 제법 맛이 난다.  



11:45에 표선해수욕장 주차장에 차를 세웠는데 배가 아파온다. 흑. 화장실을 급히 찾는다. 다행히도 큰 화장실이 있다. 그런데, 휴지가 있을까?  살았다. 휴지가 있다. 역시. 이제 맘 편히 걸을 수 있겠다. 보통은 하도 많이 걸어서 내 몸이 모든 수분을 다 빨아들여 배탈이 안 나는데 어제는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지나쳤나 보다. 흑.  



한층 가벼워진 배 상태로 12:12에 3코스 출발점인 온평포구에서 출발하다. 화창한데 바람은 조금 분다. 택시에서 내려서 3코스 표지석으로 간다. 그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는데 저쪽에서 오시는 분이 있다. 아마도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오신 것 같은데, 택시 타고 오고 출발 스탬프 뒤에서 거드름 피우는 내 모습이 좋게 보이진 않으셨나 보다. 그래도, 말을 붙여 여쭤보니 올레길 일곱 바퀴째 도신다고 한다. 대단하다. 3코스는 오름을 경유해서 해안길로 걷는 3-A코스와 계속 해안으로 걷는 3-B 코스가 두 개 있다. 둘 중 하나 선택해서 걸으면 된다. 그분은 3-B코스로 가신단다. 그분이 먼저 출발하셨는데 얘기 좀 더 듣고 싶은데 과연 그 고수를 따라잡을 수가 있을까.  


해안을 따라 걷다 이내 작은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혼자 다닐 수 있는 작은 오솔길로 접어든다. 꾸불꾸불 나무 사이로 난 꼬불꼬불 오솔길, 한적하고 좋다.  



조금 더 걸으니 막걸리 한잔 하고 계신 그분이 계신다. 옆에 가서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막걸리 다 드시더니 쓰레기봉투와 집개를 챙겨서 쓰레기 주우면서 가신다. 뒤따라 가며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LG전자 분당 서비스센터에서 소장하셨다는데 퇴직하고 1년 넘게 모슬포에서 살고 계시단다.  



올레길은 시사저널 편집장 하셨단 서귀포 출신 서명숙 이사징님의 퇴직금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영감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받으신거구. 올레길은 공유지가 60%, 사유지가 40% 정도 되는데 사유지는 주인들의 허락이 절대적이다. 사유지로 길을 내주시고, 난 길들을 가꾸고, 리본을 달고, 난간을 설치하고 등 처음 길을 낸 것 만큼 유지보수에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들어간다. 특히, 태풍이 오면 해안길 돌들 다 정비도 해야 하는 등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들어간다. 전체 26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어 완주 기념일 후원일 경우 후원금도 26만원으로 되어 있다고 하신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도 계속 쓰레기를 줍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 걷는 속도는 나 보다 더 빠르시다.



차도 안쪽 바다 인접한 갯바위 길을 걷는다. 각종 꽃들이 꿋꿋하게 그 생명과 아름다움을 지키고 있다. 흰색의 갯무꽃, 푸른 갯강활, 노란색의 화려한 암대극까지 하나하나 알려주신다. 그분이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이름도 모르고 '와아' 한번 하고 지나쳤었을 제주의 자연과 식물들.  



바다 위 고운 잔디가 깔린 드넓은 목장이 드러난다. 바로 신풍 신천 바다목장. 그 위로 길이 나 있다. 사유지에 난 길, 바다와 녹지의 조화, 이런 자발적인 참여가 올레길을 만드는 거다. 목장을 안쪽으로 7-8미터 당기면서 멋진 초원과 바다를 느낄 수 있는 길을 터주신 목장주께 감사하며 그 길을 만끽했다.


오늘도 바람이 제법 분다. 모슬포 형님은 모슬포에 비하면 덜한 거라고 하시네. 모슬포는 넘 바람이 많이 불어 몹쓸포라고. ㅎㅎ 다음에 모슬포 앞 가파도 코스 걸을 때 한번 연락하라고 말씀하시네. 그래서, 바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모슬포 이자섭 형님, 꼭 연락드리고 찾아뵐게요. 자섭 형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얘기는 이어진다. 11코스 걸을 때 정난주 마리아 성지에 가 봤는지 물으신다. 정난주 마리아님의 묘역이라, 그냥 지나친 것 같다. 왜 그러시냐라고 다시 물으니 얘기를 풀어주신다.


정난주는 황사영 백서를 쓴 황사영의 아내이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로 숙부 정약전을 통해 서학을 배우고 고모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남편은 피신했다 황사영 백서를 쓰게 되었고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 발각되어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고, 아내 정난주는 제주도로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제주도 귀양길에 정난주는 두살배기 아들을 추자도 갯바위 위에 놓고 제주로 왔는데, 그 아이는 어부의 손에 키워지고 나중에 어머니 사연을 듣고 제주가 잘 보이는 하추자도 언덕에 올라 엄마를 그리며 눈물로 기도했다고 한다. 그 황경한의 묘와 버려진 갯바위 위에 세워진 눈물의 십자가가 추자도에 있는데 꼭 가서 보라고 말씀하신다.


길(Road)은 연결이고 스토리다. 11코스의 정난주는 18-1코스 추자도의 아들과 연결되고, 이런 스토리를 품은 길은 걷는 이의 감동을 증폭시킨다. 벌써부터 추자도가 기대된다. 그래서 그 형님께도 꼭 가서 황경한 묘 앞에서 기도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형님과의 인연도 계속 이어지질 기원해 본다.  



이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물 빠진 표선해수욕장, 모슬포 형님도 이렇게 물 빠진 표선해수욕장은 처음 본다고 말씀하신다. 백사장이 워낙 길고 평지에 가까워 물이 들어오면 신발 벗고 얕은 물을 가로질러가면 훨씬 길도 단축되고 좋단다. 지금은 물이 없고 다소 추워 원래 코스인 해수욕장을 끼고 걷는 길을 걷는다. 담엔 꼭 그렇게 시도해 봐야겠다.  


오후 3:40에 도착. 3시간 6분 동안 14.53킬로를 걸었다.  



올레길 3코스 걷고 6시쯤 숙소로 돌아왔더니 우석(현 unblock & LINE Tech Plus 대표)이가 보낸 택배가 있다. 열어 보니 발렌타인 술과 Cigar 세트가 들어있는 게 아닌가. 거기에 오크통 나무 모양의 ‘힙 플라스크’도. 흑, 넘 감동. 똘똘한 제자 한 명이 이리 큰 감동을 주다니. 올레길 피로가 다 풀린다.



내일 올레길부터는 '힙 플라스크'에 양주를 담아 다녀야겠다. 물론 술은 걷는 자에게 어울리는 'Johnnie Walker'이다. 대전 계시는 정수형님은 조니 워커를 보고 '좋으니, 걷는 자여'라고 말씀하시네. 역시, 낭만이 있으시다. ㅎㅎ


P.S.

3-B코스는 바닷길, 곶자왈, 바다 목장길, 드넓은 표선해수욕장까지 아름다운 길이다. 바닷바람도 맞으며 갯바위 아름다운 꽃들도 즐기며 가다 보면 어느새 도착한다. 같이 걷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대화가 잘 통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올레길이다. 3코스 종점 및 4코스 시작 간세(조랑말 모양의 스탬프 보관 조형물)는 '올레꾼 배우 류승룡'이 후원해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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