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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23. 2021

28 제주 해안가의 아름다움과 지루함을 동시에 느끼다

20210410

제주 해안가의 아름다움과 지루함을 동시에 느끼다

(4코스, 19킬로, 표선해수욕장-남원포구)


두부김치와 참치캔 하나로 아침을 해결하다. 그리고, 전날 도착한 ‘힙 플라스크’에 양주를 담는다. 플라스크 입구가 좁아 빈 페트병을 잘라서 깔때기 모양으로 만든 후 칼로 구멍을 뚫어 실험을 해보니 조금 샌다. 그리고 구멍 맞추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빨대를 꼽으니 양주 따를 때 지탱도 잘 되고 술도 새지 않는다. 역시 결핍이 혁신을 만든다. ㅎㅎ



술은 무슨 술 넣었냐고? 어제 선물 받은 발렌타인은 아니다. 걷는 사람들을 위한 술 ‘Johnnie Walker’이다. 조니 워커 케이스에는 ‘Keep Walking’이라 적혀 있다. 이것도 우석이가 지난번 제주 왔을 따 선물로 준 건데 잘 걸으라고 이 술을 준 것 같다. ㅎㅎ 이 사진을 페북에 올렸더니 김정수 형님이 'Johnnie Walker: 좋으니, 걷는 자여?'라고 댓글을 남겨주신다. 라임 쩐다.  



그리고, 경건하게 발가락 밴드 의식을 치른다. 4개부터 시작한 밴드가 이젠 8개다. 발가락 6개, 발바닥 2개. 내 소개로 산티아고 순례길 걸은 정수 형님(현 대전창조혁신센터 센터장)은 ‘어떻게 물집이 생기죠?’라고 묻는데 보통 인간이면 다 물집 생긴다. 형님이 군인 출신이라 특이하신 거다. ㅎㅎ



다시 온 표선해수욕장, 어젠 물 다 빠진 백사장이 물로 가득 찼다.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 1킬로 가까운 백사장이 바닷물로 차다니. 바람 부니 표선에서 그 바람을 즐기며 패러 세일링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바람의 세기만큼 빠르게 바다를 가르며 바람을 타고 있다. 멋지다.



오전 11:11 출발하기 전 플라스크의 양주를 마신다. 이건 순전히 바람이 많이 불어 추워서 먹는 거다. 두 모금 마셨는데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상쾌한 쓰라림, 꿀맛이다. 어제 스카프를 산 올레 안내소에 들러 안내소 선생님께 인사하고 출발하다.  


바다 옆으로 해비치 리조트을 끼고돈다. 애들 어렸을 때 여기 묶은 적 있었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와이프와 산책 나갔다가 으슥한 동백나무 사이로 들어가 바다를 바라보며 스릴 넘친 경험도 했었지. 무슨 상상 하시는가? 뭐, 자유지. ㅎㅎ



조금 걸으니 어제와 같이 해안 돌담길이 이쁘게 꾸며져 있다. 흙길에 검은 돌담으로 이게 길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 옆으로는 짙은 노랑의 암대극이 멋들어지게 피어 있다. 간세 모양의 큰 액자를 지나 언덕을 조금 오르니 곶자왈이 펼쳐지고 멕시코에서 날아온 백년초 선인장도 보인다. 쉬리 언덕 같은 벤치가 있는 곳을 지난다. 나도 그 벤치에 앉아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도 삼각대도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자전거 타고 오는 남자 세명을 봤다. 그 뒤에 오토바이가 따르고 있다. 짐은 오토바이에 다 실려있다. 이것도 황제 사이클링이다. 산티아고 순례길로 치면 본인은 가벼운 작은 가방 메고 무거운 짐은 택배로 다음 숙소까지 보내는 것과 같다. 일명 '당나귀 서비스' ㅎㅎ


바람은 부는 데 뒷바람이다. 한결 수월하다. 여긴 광어 양식장이 유독 많다. 다 광어 양식이다. 양식장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파도 소리가 겹쳐서 들린다. 요란하다. 양식장서 뿜어 나오는 오수는 또 어떤가? 콸콸콸콸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양어장 소리를 벗어나니 NH 제주 수련원이 기가 막힌 언덕에 떡 하니 있다. 그 앞으로 난 산책로는 입 벌어지게 만든다. 제주에는 유독 전망 좋은 곳에 기업 연수원들이 많다. 과연 이런 좋은 곳에서 연수가 될까? 힐링이라면 모를까. 올레길은 매일 다른 모습으로 나를 놀래킨다.  



연수원을 조금 지나 소망터널을 지나니 산책로 스피커에서 플루트 곡이 흘러나온다. 아 좋다. 그렇게 해변을 좀 더 거닐다 중간 스탬프 지점, 알토산 고팡에 도착하다. 9.6킬로 걷고 점심 겸해서 쉬다.  



고팡에서 배 고파 볶음밥을 시켰는데 산더미처럼 주신다. 아직 갈길이 멀다고 든든히 먹고 가란다. 볶음밥도 훌륭했지만 그 옆에 나온 국물이 대박이다. 얼큰하면서도 구수한데 짬뽕 국물 같기도 하고 육개장 같기도 하고. 하튼 맛났다. 거기서 양주도 두 모금 마셨는데 그 상큼함이란 두말하면 잔소리지. ㅎㅎ


양주  모금  마시고 에어팟 노캔 모드로 꼽고 오후 1:50 다시 출발한다. 이제 절반 남았다. 조금 걷다 강아지와 함께 올레길 걷는 아저씨를 봤다. 저것도 괜찮네. 동네 강아지가 따라오니 아저씨는 자기 강아지를 안고 걷는다. ㅎㅎ 한적한 마을길도 나름 운치 있네. 근데 강아지랑 같이 걸으면 누가  고생하는 건가.  아저씨를 다시 만나 물어보니 강아지가  고생하는  같다시네. 괜스레 강아지에게 미안하다고. 이게 진짜 개고생이다. ㅎㅎ 



오후 3시, 햇살이 뜨겁다. 계속 차도 옆 딱딱한 시멘트 길을 걷는다. 아직 뜨거운 지열이 올라오는 계절은 아니지만 오늘은 뜨겁다. 이때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하여’가 흘러나온다. 사랑도 일도 주저하면 안 된다. 일단 쫄지말고 저질러야 한다. 그래야 뭐든 결말을 볼 수 있다.  



해안 바위길을 걷는가 싶더니 다시 차도가 나온다. 뜨겁다. 그나마 바람이 열기를 식혀준다. 4월 오후 3시의 태양은 뜨겁다. 뜨겁기 때문에 오히려 더 빨리 걷는다. 빨기 가서 쉬고 싶다. 해안 차도를 달리듯이 걷는다. 야자수와 열대 나무들이 나오는 밭을 지나, 검은 돌 가득한 해안가를 지나 내달리니 남원포구 4코스 종점이 보인다.  


오후 3:40에 3시간 48분 동안 18.7킬로를 걷고 4코스 종점에 도착했다.  



5코스 출발점에서 올레 패스포트를 사서 한 바퀴 돌고 여기 와서 안내소 선생님께 인사하니 기분이 묘하다. 이제 남겨둔 7코스만 걸으면 제주도는 해안가로 한 바퀴는 도는 거다.


P.S.

표선부터 시작하는 길은 중간 스탬프 지점인 알토산 고팡까지는 해안 숲길도 있고 아름다운 절경들도 펼쳐져 지루하지 않다. 중간 지점 이후는 거의 해안도로 옆 시멘트 바닥 길이라 발이 다소 아프다. 고도 차이는 거의 없으나 생각보다 길게 느껴지는 차도로 인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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