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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Apr 26. 2021

29 해안가로 제주 올레길 한 바퀴를 완성하다

20210411

해안가로 제주 올레길 한 바퀴를 완성하다

(7코스, 17.6킬로,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월평마을)


마이클 부불레의 ‘Home’을 들으며 발가락에 밴드를 붙인다. 오늘 7코스만 걸으면 제주도 한 바퀴가 완성된다. 걸어서 제주 한 바퀴는 꼭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준다.


오늘은 커피 맛도 더 구수하다. 대신 아침은 일찍 출발해야 하기에 생략한다.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데 시간이 빠듯하다.


제주 내려와서 오히려 잠도 적게 자고 더 바쁜 것 같다. 매일 졸리다. 누가 놀러 왔다고 하는가? 난 더 치열하게 걷고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


8:30에 집을 나선다. 600번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 도착한다고 안내방송이 나온다. 버스가 서길래 타려고 했더니 어느 분이 이건 서귀포 가는 버스가 아니란다. 다시 보니 통근 전세버스다. 하마터면 딴 곳으로 갈 뻔했다. 1-2분 더 기다리니 600번 버스가 온다. 8:50에 제대로 탑승하고 서귀포로 간다. 10:10에 샛기정 공원에서 하차한다. 여기서 제주올레여행자센터까지 걸어간다.


올레길 걸으며 돼지국밥, 해물라면 등을 너무 많이 먹어 버렸다. 오늘은 제주도 한 바퀴 마침표를 찍는 날이다. 산티아고에서 처럼 우아하게 파스타로 브런치를 먹고 싶었다. 바로 앞에 이태리 레스토랑이 있는 게 아닌가. 역시 우아하게 마무리하려는 올레꾼을 하늘이 알아봐 주신다.



토마토 수프, 세 가지 종류의 빵과 따뜻한 커피. 나도 이런 걸 즐길 줄 안다. ㅎㅎ 오랜만에 오일 파스타, 맛나다. 커피와 양주 한 모금으로 입가심하고 출발점으로 간다.


11시 정각에 출발점에서 양주 한 모금 더 마시고 걷기 시작하다. 올레 선생님이 사진도 찍어주신다. 오늘 딱 4시간만 잘 걷자. ㅎㅎ


미국과 남아프리카에서 온 외국인 여성 두 분을 뵙다. 7코스 걷는다기에 패스포트에 스탬프 찍는 곳을 알려 주고 난 혼자 인증샷 찍고 있는데 그들이 7-1 코스로 들어서는 거다. 그래서 급히 불러 7코스는 이쪽 길이라고 알려주었다.



올레 센터에서 내려오면 칠십리 시공원이 나오고 그 안에 작가의 산책길이 있다. 와우, 서귀포 내려오면 본격적으로 글 쓸건대 자주 와서 걸어야겠다. 작가의 산책길이라 그런지 유난히 시비가 많다. 시 좋아한다고 괜히 시비 걸진 마시라 ㅎㅎ


공원 산책길 걷는데 바로 나오는 폭포, 갑툭튀 느낌인데 장관이다. 바로 앞에 걷던 커플과 거의 동시에 ‘우와’라고 소리치고(찌찌뽕) 서로 웃는다. 천지연 폭포란다.



폭포를 돌아 공원을 나오니 바로 오름 삼매봉이다. 그래도 끝날 때 오름보다는 초반에 오름 오르는 게 낫긴 하지.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은 온통 계단이다. 이거 역방향으로 올라오려면 죽음이겠다. 끝이 안 보인다.


내려오니 문섬 앞 외돌개. 기암절벽이, 그 위로 멋진 길이 나 있다. 바람도 시원하게 반겨준다. 연신 탄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는다. 덕분에 느리게 느리게 걷는다. 사실 길을 빨리 걸을 수 없다. 다 그림 같다.



외돌개를 벗어나서야 속도를 낼 수 있다. 속도를 내려고 하는데 오르막이다. 그래 내려왔으니 이젠 올라가야지.



외돌개에서 돔베낭골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이쁘다. 돌벽이 높게 만들어진 좁은 길도, 해안 절벽 위 산책로도,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도 다 자연이 빚은 작품이다.



오늘 저녁 친구 만날 약속만 없었다면 여기서 눌러앉아 양주도 한 모금하고 시도 썼을 텐데. 아쉬울 뿐이고.


대륜마을. 그리고 수봉로. 올레길 초기 개척 당시 길을 찾아 헤매던 올레지기 김수봉님이 바닷가 비탈을 염소가 지나가는 걸 보고 삽과 곡괭이로만 홀로 만든 길.



법환마을, 아름다운 범섬을 따라 길게 나 있는 해안도로. 속도를 내며 걷다. 해안 돌길로 잡아든다. 움푹 파인 그늘진 곳에서 올레꾼 서너 명이 쉬며 간식거리를 드신다. 난 계속 걷는다. 좁은 길이 나오고, 그래 이게 평범한 올레길이지 하는 순간 오른쪽으로 기우뚱, 발목을 삘 뻔하다. 조심 또 조심이다.



오후 1:40에 11킬로 걷고 한라봉 주스 마시며 잠시 쉬다. 앞에 한 여인은 막걸리에 파전을 먹는다. 부럽다. 난 우석이가 준 양주나 먹어야겠다. ㅎㅎ 십분 쉬고 다시 출발한다. 이제 6.6킬로 남았다.



개천 옆 오솔길. 소나무. 잔잔한 물소리. 그리고 건너는 강정천. 그다음부터는 잘 포장된 길 옆으로 딱딱한 길을 2킬로 정도 걷는다. 뙤약볕 그리고 바람. 지렁이도 말라죽은 아스팔트. 그리고 강정 바닷길, 아스팔트 옆 잔디 길이 그나마 푹신하다.



그리고 나오는 월령포구,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이렇게 포구를 만들 수도 있구나. 가장 아름다운 작은 포구 중 하나인 듯하다. 파란색의 작은 배들이 청록의 바다, 파인 검은 바위와 조화를 이룬다.



이제 끝이 보인다. 19일 동안 바람과 추위와 열기와 허기와 숨 막히는 마스크를 견디며 걸은 길, 발바닥과 발가락의 물집과 까매진 피부가 영광의 상처로 남았다. 마지막을 환영해 주듯 펼쳐진 바다, 제주는 끝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기만 한다.


월평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숲, 작은 개울 그리고 마을.



종착지 간세가 보인다. 즐거운 마음에 환호성 지르며 뛰어간다. 이제 끝이다. 오후 3:08에 3시간 52분 동안 17.99킬로를 걷다.


3월 18일 8코스부터 시작한 올레길, 오늘 7코스를 끝으로 총 19일 동안 367킬로를 걸어 제주도를 내 두발로 완주하다. 하루 평균 19.3킬로를 걸었네. 19일 동안 모진 바람, 뜨거운 열기, 습기 가득한 추위, 툭하면 점심을 건너뛰면서 허기와 싸우고, 발바닥과 발가락의 물집을 참으며 걸었다. 완주 메달까지는 7-1, 14-1코스와 섬 코스 3개만 남았다. 끝까지 겸손하게 걷자. ㅎㅎ



그동안 내 두발을 보호해준, 고생만 시켜서 미안한 등산화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 산티아고 다 걷고 땅끝마을인 피스테라(Fisterra)에 도착해선 걸었던 등산화를 태운다고 하는 데 나도 그러고 싶었다. 아서라, 아직 난 걸어야 할 다섯 코스가 남아있다.


일찍 걷고 빨리 제주로 돌아온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닌 첫 직장 KTB 입사 동기이자 친구인 안상준(현 코오롱 인베스트먼트 대표)과 저녁 약속이 있어서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인데 입사동기라 편하게 지내는데 제주 1박 일정으로 오늘 와서 같이 저녁 먹자고 한다. 연락해줘서 고맙다.



두루두루식당에서 객주리 조림을 먹었다. KTB 들어와서 처음 친해진 게 나였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같이 늙어가는 오십 대에 접어든다. 예전 직장 초년병 시절 함께 송상엽 회계학원 함께 다녔던 것도 기억난다.


특이하고 재밌게 산다고 나에게 말해준다. 그치, 내게 이런 삶 빼면 시체지. 안대표도 언젠간 은퇴할텐데 미리 앞으로 뭘할지 고민하고, 시간 많을 때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둬야 은퇴 이후의 삶이 풍족해 질거라 답을 해줬다.


2차 유행포차까지 왔다. 둘 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벽에 쓴 내 시 ‘고독’을 보고 형이 놀란다. ㅎㅎ 이런 게 추억이고 인생이지.


안 대표 숙소까지 카카오택시 불러 잘 보내드렸다. 제주까지 와서 시간 내서 저녁 함께 해줘서 고맙다. 가면서 잘 걸으라고 게토레이까지 사주고 가다니. 흑. 정이 넘친다.


제주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P.S.

올레길의 중심 도시는 제주시가 아니라 서귀포시다. 그래서, 올레 완주 인증센터도 서귀포에 있는지 모르겠다. 서귀포로 들어오는 6코스도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서귀포에서 나가는 7코스는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오름, 기암절벽, 섬, 산책로, 돌담길, 귤 밭, 오솔길 등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길이 바로 7코스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다 있는 것 같다. 제주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올레길을 걷고 싶은 분들에게 하나의 코스를 추천한다면 바로 7코스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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