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친구와 함께 이승악 오름에 올랐다. 제법 햇살이 뜨거운 날이었지만 삼나무가 우거진 깊은 숲 속이라 그늘지고 공기도 상쾌해서 좋았다. 기분 좋게 10킬로 정도 걷고 성게미역국과 돼지불고기 등 맛난 음식도 먹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차를 몰고 성산으로 이동했다. 성산 일출봉 앞에 있는 내수면 호수 바로 뒤편이다. 서쪽으론 아름다운 노을이 진다. 바로 그때 와이프로부터 전화가 온다.
집 퓨즈가 나긴 듯하다. 차단기를 올려도 계속 내려온단다. 이미 관리사무소도 퇴근한 오후 8시 무렵, 와이프는 다짜고짜 이사 가자고 난리다.
이 순간은 아름다운 노을도 쾌적한 공기도 느끼지 못한다. 가장으로서 도와주지 못해 괴롭다. 모차르트는 와이프와 장모의 구박에도 밤의여왕 같은 걸작을 남겼는데, 오히려 그런 구박이 그에게 더 큰 영감을 주었는데 난 그렇지 못하다.
제주의 생활은 그지없이 좋았다, 두 달까지는. 두 달 하고도 절반이 넘어가니 슬슬 지겨움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아직도 보름은 더 있어야 하는데.
외롭고, 고립되고, 핍박받을수록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는데 난 그렇지 못하다. 아직도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너무나 좋은 자연은 때론 창작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듯하다. 오히려 더 고립시키고 더 바닥으로 떨어져야 창의력은 솟아나나 보다.
성산에서 이틀 보내고 제주시로 올라간다. 더 좁은 방에 갇히게 된다. 공간이 주는 고립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공간 변화다. 몸은 폐쇄된 공간에 머물겠지만 정신은 더 자유로워지겠지. 반드시 그래야 된다.
다행히도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와서 봐주고 있단다. 안심도 되지만 불안감도 엄습한다. 제주생활도 곧 마무리되고 복잡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불안감,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초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제주를 떠나기 싫은 저항감, 그리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 등.
머리는 비워졌으나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여전히 미안함과 불편함이 교차한다. 그래 원래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면과 나쁜 면은 서로 맞닿아있지.
난 오늘도 글 한 줄 쓰지 않고 이렇게 다소 긴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2021.05.31. 오후 9:03 제주도 성산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