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2017.10.03. Day 0
02 순례, 그리고 고독
- 다시 2017.10.03. Day 0, 시차 때문에 하루 번 날
지금 막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서 산티아고 순례길 출발지 부근인 바욘(Bayonne)으로 출발하는 TGV를 탔다. 에어팟에선 ‘You raise me up’이 흘러나온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순례 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오후 6시, 날은 덥지 않은데 햇살은 여전히 뜨겁다. 지금 기온이 17도인데 이리저리 몽파르나스 역까지 헤매느라 땀은 제법 흘렸다. 파리 CDG 공항에서 TGV 출발역까지 오는 것도 그렇고, RER 전철을 타고도(의자가 접히는 줄 모르고) 무심코 일어섰다 다시 앉으려다 엉덩방아를 세게 찍지 않나, 유럽 유심칩 교체하기 위해 기존 유심칩 빼낼 핀이 없어 진땀 흘리지 않나, TGV 9번 차량인데 10번 차량에 가서 엄하게 자리 비워달라 하지 않나, 실수가 셀 수가 없다. 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행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 생각된다.
참, 유심칩 교체는 Drug Store에 들러 반짇고리를 사서 해결했다. 이가 없음 잇몸이니. ㅎㅎ 근데 유심 꺼내려고 핀 한번 쓰는데 8천원을 쓴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다. 쩝! 그래도 긴 순례길에 혹 바느질 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매번 여행을 다닐 때마다 그 여행과 적합한 책을 하나 골라 온다. 2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화성에서 생존한 괴짜 과학자 이야기인 ‘마션’을 챙겨 왔었다. 그것도 두꺼운 종이책으로. 그래서, 순례 동안 내내 그 책 버릴 궁리만 하기도 했지. 혹 일론 머스크 땜에 화성에 갔다 조난당할지 몰라 살려두기로 했지. 이번엔 많이 달라졌다. 리디북스 페이퍼에 전자책으로 다 담아왔다. 그중에 메인은 단연 ‘로버트 컬’의 ‘솔리튜드’이다. 남미 저 아래 인적과 100킬로 이상 떨어진 외딴 파타고니아 야생지에서 고독과 함께 보낸 1년간의 기록이다. 국내에 있을 때도 조금 읽었는데 본격적으로는 순례기간 동안 읽을 예정이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긍정의 고독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순례 전기간 동안 말을 좀 줄이고 홀로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한다. ‘로버트 컬’처럼 아주 외딴곳으로 갈 수는 없지만 나의 내면 속 깊이 들어가 고독을 느껴보고 싶다. 근데 책은 가벼워졌는데 이번엔 전자책 배터리가 걱정이네.
집을 떠나 공항까지 1시간, 인천서 파리까지 12시간, 파리 공항에서 몽파르나스 TGV역까지 1시간,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 초입 부근인 이곳 바욘까지 4시간 등 총 이동시간만 18시간이며 대기시간까지 포함하면 집에서 바욘까지 무려 24시간이 걸렸다. 왜 굳이 이런 얘기를 하냐고? 이렇게 힘들게 와서 지친 몸을 이끌고도 이처럼 글을 쓰고 있는 진심을 조금은 이해해 달란 말이다. 이건 구걸 아니다.
내일 날은 맑고 화창할 거라 한다. 예전 나폴레옹이 스페인 공격할 때 갔다던 그 피레네 산맥(해발 1500 고지)을 내일 넘게 된다. 이번 순례 일정 중 가장 힘든 코스라고 한다. 기대된다. 그 기대감을 안고 이제 잠자리에 든다.
2017.10.03. 오후 11:56 프랑스 바욘 어느 여인숙 느낌 호텔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