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Albergue or Anbergue?

2017.10.05. Day 2

by 메추리

04 Albergue or Anbergue?

- 2017.10.05. Day 2


전날의 고역은 오히려 다음날 준비성을 기르게 한다. 혹 다리 땜에 오늘부터 순례길 일정을 망칠지 몰라 저녁부터 근육통 연고를 바르고 마사지도 하고 잘 때는 휴족시간 파스도 붙이고 잤다. 그리고, 시차 부적응으로 새벽 4시에 눈이 떠졌을 땐 홀로 복도에 나가 스쿼트도 하면서 근육을 풀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은 한결 가볍다.

아침 뭐 먹었는지 뭐가 중요하겠냐 만은 굳이 밝히겠다. 스타트업 이그니스에서 제조 판매하는 분말형 단백질 대용식(HMR) 랩노쉬 우버 밀크티 분말을 물에 타 먹었다. 근데 9일분을 챙겨 온 건 오버 아니야? 그게 나를 힘들게 한 주범이 되었고. 그래서 무지 빨리 해치워야 한다. 랩노쉬 프로틴 바도 있는데. ㅠㅠ

새벽 일찍 눈이 떠진 복으로 시간이 부족한 순례자들에겐 사치 중 하나인 모닝 샤워를 여유 있게 했다. 비듬 털어 내느라 모닝 샤워는 필수지. 오늘은 등산모 안 쓸 거거든. 모양 빠져서리. ㅎㅎ 그리고 침낭을 접고 배낭을 꾸리고 하다 보니 7:30분. 이제 출발이다.

여전히 어둡다. 스마트폰 LED 등에 의지하며 행군(?)을 계속한다. 어제 만난 아일랜드에서 Working Holiday 중인 한국인 두 명의 꽁무니를 쫒아 간다. 이것도 재밌다. 내가 주도 안 하니.

해가 뜨는 8시쯤부터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적막한 목장에 은은하게 말이다. 말들은 고요히 이슬 내린 풀을 뜯고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은 안개를 천천히 걷어낸다. 이때 나오는 음악이 ‘You raise me up’. 풍경과 조화를 이룬 선율이 내 심장을 두드린다.

전날 한없이 고통스럽게, 끝까지 체력을 방전시켜 나를 밑으로 밑으로 낮추게 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의 위엄을 세워주신 이유가 여기 있었다. 산티아고 첫 코스가 괜히 어려운 게 아닌 거다. 먼저 자연을 보며 덤비지 않는 경외감을 느끼게 하며, 순례길 전 구간 동안 자신을 낮춰 아래를 보고 겸손하게 하라는 의미를 담은 게 아닌가? 그리고 힘든 고통의 시간을 겪은 그다음 날 아침에 자연을 보고 스스로 느끼게 하려는 게 아닌가? 거기에 ‘You raise me up’ 이라니. 눈물이 안 나올 수 없다.

근데 왜 음악도 풍경도 jolly 아름다운 거야? 18!

걸어가며 팔을 옆으로 뻗어 ‘You raise me up’을 부른다. 이 아름다운 자연과, 이 감동적인 멜로디와 여기 산티아고 오게 하며 걷게 만드신 분께 감사드린다.

7:30분부터 시작하여 3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13.77킬로. 이게 정녕 가능하단 말인가, 전날의 저질체력으로? 뭐 애플 워치에 이렇게 찍혔으니 일단 믿어야지. 전날 자기 전에 파스에 연고에 근육운동에 만발의 준비를 한 나의 공로지 뭐. ㅎㅎ

이제 절반은 지났다. 9킬로 정도만 더 가면 된다. 오늘 목적지인 수비리(Zubiri) 표지판이 보인다. 7.5킬로. 껌이지. 근데 껌이 아니더라. 좁으면서 심하게 긴 경사길을 올라가야 한다. 깔딱 고개 수준이 아니다. 허벅지 근육이 뭉쳐오기 시작한다. 알이 밴 거다.

알베르게(Albergue)는 순례자들이 침대 한 칸 빌려 묵는 5-10유로 정도 되는 숙소를 말한다. 오랜 시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알이 배기게 마련이다. 근데, 오늘은 ‘Albergue’의 스펠링 중 ‘L’을 ‘N’으로 바꾸고 싶다. 그럼 알이 안베르게(Anbergue). 안 웃니? 웃는 사람은 존경해 줄거다 ㅎㅎ

힘이 드니 헛소리가 나온다. 이를 악물고 계속 걷는다. 뒤에 오던 순례자들이 다 나를 제친다. 그래도 처벅처벅 천천히 걷는다. 저 앞에 물소리가 들린다. 돌다리를 건너니 바로 알베르게가 있다. 비록 알은 배겼지만 알베르게에 묵을 수밖에.

오후 1:40분. 오늘 총 38,410걸음으로 27킬로를 왔다. 이런 나에게 적어도 생맥 석 잔은 선물로 줘야 한다.

2017.10.05. 오후 6:21 수비리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쓰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