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8. Day 5
07 The Purpose of Things
- 2017.10.08. Day 5
헐~ 어젠 2층 침대 위칸으로 배정받았다. 그게 뭐 대수인가 싶겠지만 실젠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준다. 여긴 5유로(6천원 정도) 하는 매우 저렴한 숙소로 2층 침대 폭도 좁을 뿐 아니라 그 어떤 난간도 없다. 매트 위에서 조금만 잘못 구르면 바로 떨어질 우려가 있다. 잠자리도 신과 더 가깝게, 반듯하고 경건하게 자라는 뜻인가?
위에서 자면서 내가 의외로 천장 보고 반듯이 눕는 것보다 한쪽 방향으로 칼잠을 자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 빼고는 다른 어떤 수확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가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1:30분쯤 깼다. 30분 더 뒤척이다 1층 식당으로 내려왔다. 거기서 로버트 컬의 ‘솔리튜드’를 읽는다. 순례길에선 첫 독서다. 오롯이 혼자 고독에 빠진다.
읽다 보니 이번엔 내 문체가 로버트 컬을 따라가는 것 같다. 지난번엔 ‘마션’ 작가 ‘앤디 위어’를 따라가던데. 하튼 오늘은 먼동이 트기 전 새벽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뭔가 꿈틀거림이 있기 전 새벽의 고독을 말이다. 그래서 6시 좀 넘어 출발할 거다.
고독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 있으면
고독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막상 그렇게 해보니
파도소리도 들어야 하고
구름 흘러가는 것도 봐야 하고
바람도 느껴야 한다
바쁘다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고
시간도 내버려 두는데
자연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고독할 틈이 있겠는가
2017.08.24. 오후 5:20 제주 용두암에서 쓰다.
이른 시각이라 별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웃음이 나온다. 아름답다.
이태리에서 온 노부부인 빈첸토와 마리아를 만났다. 며칠 전 순례길에서 파는 지팡이가 아니라 나뭇가지를 지팡이로(그것도 아주 멋진) 들고 다니는 걸 보고 ‘Good Stick’이라고 인사를 한 터였다. 내가 앞질러 가는데 뒤에서 ‘매튜~’라고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 보니 빈첸토다. 내가 잘못 길을 접어드는 것을 보고 그가 부른 거다. 아직 깜깜한 먼동 트기 전이라 노란색 화살표가 잘 보이지 않는다.
고마웠다. 그리고 바로 ‘You have a good stick and good eyes’라고 인사했다. 그리고 나오는 음악이 ‘Pie Jesu(피에 예수)’. 아~ 새벽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오늘은 달빛 별빛에 의지해서 걷는다. 저기 가오리 모양의 별자리가 보인다. 1시간만 일찍 나와도 별빛을 맘껏 즐길 수 있다. 이 얼마나 좋은가? 새벽의 고요. 거기에 거슬리는 지팡이 소리. 고요를 해치기 싫어 지팡이를 들고 걸을 수밖에. 지금 기온 7도. 파바로티의 카루소가 나온다. 입김도 나와 안경을 흐리게 한다
작은 마을을 관통한다. 8시 무렵이다. 이때 그리스 작곡가 테오도라키스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조수미 노래)’가 나온다. 아 드럽게 타이밍 맞네.
지금까지 읽느라 고생 많았다. 내가 사람 만나고 걷고 음악 듣고 이런 얘기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오늘의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부터다.
모든 물건에는 그 용도가 있다. 순례길만 오더라도 여러 물건들이 필요하다. 지팡이는 특히 내려갈 때 무릎 보호에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올라갈 때 기어가듯 의지하는 효과도 있다. 밴드는 물집 부분이 덜 쓰리게 만들어 준다. 자외선 보호크림은 또 어떤가? 내 백옥 같은 피부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ㅎㅎ
사람도 용도가 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신의 의도가 담긴 목적(용도)이, 신을 믿지 않아도 그 나름대로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 용도/존재의미를 인식하고 만들어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의 용도는 무엇인가? 나의 인생 목적은 또 무엇인가? 신이 만든 의도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 일치하는가? 난 스스로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가?
뒤에 떠오르는 먼동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딱 부러지게 답할 순 없다. 까미노(순례길) 내내 생각해야 될 내 화두다.
신체의 장기도 다 각기 그 용도가 있다. 위와 장도 그 나름의 용도가 있다. 근데, 새벽 한기에 쪼그라들어 붙어 있는 고추, 니놈은 오줌 말고도 뭔가.. 뭔가.. 다른 용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게 생각이 안 나네. 징하게 안나네. 까미노를 넘 열심히 걸어서 그런가? 쩝!
8:30 카페에서 사과와 에스프레소를, 10시에 오렌지주스와 빈첸토가 건네준 포도를 먹고 오늘 목적지인 에스테야(Estella)까지 힘을 낸다.
언덕이다. 종아리, 허벅지, 물집 등이 다 괜찮아진다 싶었는데 이젠 발바닥과 뒤꿈치가 아파온다. 가지가지한다. 야고보(Santiago, 예수 열두 제자 중 한 분) 형님은 왜 스페인 먼 곳까지 와서 나를 이리 고생시키는 건지.
에스테야가 보인다. 중세의 아름다운 소도시다. 길치 본색을 드러내 듯 여기서 40분을 헤맨 후 숙소에 도착했다. 샤워와 빨래를 하고 맥주 한잔 하며 순례기를 쓴다.
37,569 걸어 27.53킬로를 와 오후 1:10에 도착함.
2017.10.08. 오후 3:57분 스페인 에스테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