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9. Day 6
08 Time to Leave, This is the Moment
- 2017.10.09. Day 6
어제는 샤워와 빨래를 하고 슬리퍼 질질 끌고 시내 산책에 나섰다. 뜨거운 에스테야의 태양을 느끼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서 여유롭게 순례자 메뉴 식사를 하며 순례기를 써 올렸다. 그리고, 오후 9시에 잠자리에 들어 11시에 깼다. MS 한국 오피스 다니는 윤부장과 순레길에 대해 1시간 가까이 메신저로 얘기를 나눴다. 그 친구는 11월에 떠나신다네. 많이 추울 텐데 안전하고 의미 있는 순례길 되길 빈다. 부엔 까미노~ 한국 돌아가서 순례길 노하우 많이 알려주기로 했다. ㅎㅎ
오늘은 여기 와서 처음으로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었다. 온몸이 아프거나 근육이 당기거나 그러지도 않은데 이상했다. 날자를 확인해 보니 오늘은 월요일이다. 여기까지 와서도 월요병은 유지되는 건가? 쩝! 서글퍼지네.
제법 이른 6:21에 출발했다. 바람도 좀 분다. 어둡다. 홀로 에스테야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 까미노 표식인 가리비나 화살표가 잘 보이지 않는다. 물어 물어 제대로 길을 들어선 것 같다가도 헤매기 일수다. 새벽의 고요는 좋으나 길이 잘 안 보이는 건 단점이다.
그러다 발견한 바닥의 가리비는 큰 기쁨이 된다. 길을 제대로 찾은 것 같아 가리비 목걸이에 입 맞췄다. 새벽의 순례길은 쉽지 않다. 고독을 즐기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조개껍데기를 발견하고 그제야 하늘의 별들을 본다. 오늘도 저 별들과 달이 나를 이끌어 줄 것이다.
3.5킬로 걸으니 이라체 수도원에 도착한다. 수도원 입구에 수도꼭지가 두 개 나란히 있다. 왼쪽이 와인 오른쪽이 물이다. 공짜다. 수도사님들이 주님을 제대로 섬기시는 것 같다. 애경누님은 나의 선택을 바로 맞추실 거다. 당연 왼쪽이다. 컵을 꺼네 맛보니 맛있다. 아마 애경누님은 내 두 번째 행동도 맞출 수 있을 듯. ㅎㅎ 그렇다! 1유로 주고 산 생수를 꺼내 물을 다 버린 다음 거기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넘치는 주님의 사랑이다.
8.8킬로를 걷고 8:5분 첫 휴식을 취했다. 오렌지주스에 계란과 사과 하나. 단출한 아침이다.
언덕에 산타 마리아 성당이 보인다. 아래로 내려오는데 마지막 가리비 이후 비포장도로가 계속 이어진다. 화살표가 안 보여 이 길이 맞나 지속 의심이 든다. 순례자도 안보이니 더 의심이 심해진다. 불안한 마음을 갖고 한참을 걸으니 그제야 화살표가 나온다. 화살표가 그 방향을 가리켰으면 일단 믿어야 한다. 그 길이 길더라도 도중에 의심하면 안 된다. 결국 그 화살표 방향이 맞고 우리는 해당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믿음의 길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 넘 좋다. 가을 추수가 끝난 탁 트인 황토색 벌판, 가벼운 발걸음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도. 화살표를 의심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나만의 길
당신이 나를 버리고 저주하여도
내 마음속 깊이 간직한 꿈
간절한 기도 절실한 기도
신이여 허락하소서
(지킬 앤 하이드 뮤지컬 중)
이젠 양팔을 옆으로 펼치며 벌판을 걷는다. 9시 이후 계속 어느 순례자 마주침 없이 홀로 이 순례길을 걸었다. 그렇게 40분간 걸었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오열하기도 했다. ‘내 마음속 깊이 간직한 꿈. 간절한 기도, 절실한 기도, 신이여 허락하소서’. 이 가사처럼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신과 만나야 된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자신의 깊은 내면과 마주해야 한다. 더 늦출 순 없다. 빨리 만나고 대면할수록 인생이 풍성해질 수 있다. 망설이는가? Time to Leave, This is the Moment.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신이든 내면의 본모습이든 만나러 떠나야 한다. 욕심을 내려놓고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온전히 자신을 버리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말이다. 그래야 인생의 본 의미를 적게나마 알아갈 수 있다. 아님 적어도 지금 떠나면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도 걸을 수 있다.
아직 화살표에 대한 믿음이 약했나 보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순례자를 만나서 오늘 목적지인 Los Arcos(로스 아르코스)를 물어보니 방향 맞단다. 원래 맞았던 거다. 내 믿음이 부족했을 뿐.
오전 10:20분 언덕 아래 작은 바에서 오믈렛과 주스 한잔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주님을 만난다. 이라체에서 가득 채워온 와인 말이다. 아 좋다.
33,963걸음을 걸어 24.55킬로를 와서 다소 이른 오후 12:10 도착했다.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 인자해 보이는 알베르게 할머니가 2층 침대로 배정해 주셨다. 뭉친 근육으로 2층 침대 오르락 거리는 것도 큰 일이거든. 바꿔달라 사정하니 나이 젊다고 웃으며 그냥 쓰라 한다. 그래, 아직 내 몸뚱이가 쓸만하지. 어르신들을 위해 오늘은 2층에서 자야겠다. 신과 조금 더 가까이 말이다.
2017.10.09. 오후 6:29 로스 아르고스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