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0. Day 7
09 Love is Free, Nature is Free
- 2017.10.10. Day 7
오후의 뜨거운 햇살은 빨래를 빨리 말려준다. 빨래를 널고 잠시 맥주 한잔의 여유를 갖는다. 좋다.
정오 갓 넘어 알베르게 도착하니 시간이 남아도 너무 남는다. 젊은 친구들은 이럴 때 어쩔 줄 몰라한다. 이 한가함을 즐겨야 하는데.
나는 나 나름의 방식으로 여유를 즐긴다. 카페에 홀로 앉아 오늘 일정도 정리하고 내일도 계획한다. 그리고 순례기도 써 내려간다. 나에게 있어 꼭 필요한 의미 있는 시간이다.
까미노는 혼자 와야 된다. 혼자 걸으며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걷는 것만 생각하면 다른 더 멋진 곳도 많다. 그런데 왜 걷는지도, 산티아고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며 떼거리로 다니는 한국 친구들이 많다. 뭔가 안타깝다.
어제 걸은 길은 숲이 하나도 없는 광활한 벌판이었다. 가을 추수가 끝난 황토색 벌판이 펼쳐지고 그 끝단에 푸른 숲이 조금 보이는 풍경이다. 흙색이 이렇게 아름답다 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 하루였다. 6일째까지 까미노 중 나에겐 가장 인상 깊었던 길이었다.
며칠 전부터 자주 만났던 친구들도 어제 까미노가 좋았다고 한다. 다들 하는 얘기가 앞 뒤로 순례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아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단다. 고도차가 거의 없는 평평한 벌판과 같아 다들 일정 속도로 늘어져 가서 그런가?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언덕이 높거나 하면 그 언덕 오른 후에 힘들어 쉬느라 한 곳에 모이는 그런 현상 말이다. 일종의 병목현상. 어제는 그게 없었다. 그래서 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거지.
늦은 점심을 먹고 얘기를 나누다 빠에서 맥주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미사에 참가했다. 한국에서 왔다 하니 한국어로 된 ‘순례자의 기도’를 나눠 주신다. 그것을 받아 들고 기도문을 읽었다.
순례자의 기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아브라함을 칼데오 땅에서 불러내시고, 그가 방황할 때 보호해주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산티아고 길을 걷는 당신의 종 저희를 보살펴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가는 여정 동안 저희의 동행이 되어주시고,
갈림길에서는 저희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고,
피로로부터 저희의 휴식처가 되어주시고,
위험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시고,
가는 여정에 저희의 쉼터가 되어주시고,
더위에 저희의 그늘이 되어주시고,
어둠 속에 저희의 빛이 되어주시고,
좌절로부터 위로와 안식을 주시고,
계획을 위해서는 이루고자 하는 강임함을 주소서.
당신의 보호로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고, 여정 뒤에는 기쁨과 함께 무사히 집으로 도착할 수 있도록 당신의 은총을 내리소서.
언제 어디서나 저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받으소서.
산티아고(사도 야고보) 사도,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다 나 같은 순례자에겐 구구절절 진한 기도다. 감사하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성당 문 오른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예수 십자가 상이 보인다. 같이 간 친구들이 다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나도 찍으려다 못 박히신 발목 부분이 이상해서 가까이 가서 보니 글쎄... 그 발목을 이쁜 꽃송이로 묶어 가려 놓은 것이 아닌가. 그것을 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뭉클했다. 뒤돌아 서면서 함께 간 친구들에게 그거 봤냐고 물으니 아무 대답도 못한다. 그래서 “사진 찍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대로 보고 제대로 느끼는 게 더 중요해. 지금 다시 가서 보고 와라”고 얘기해 주었다. 다들 되돌아와 넘 좋았다고 한다.
어제 아래층 스페인 할아버지의 코골이는 거의 탱크 수준이었다. 탱크가 서너 대 지나가는 줄. 그래도 몸이 피곤해서인지 비교적 다른 날들보다는 잘 잤다.
여기까지가 어제 얘기다. 왜 어제 다 안 썼냐고? 너도 매일 25킬로씩 걷고 스마트폰으로 수천자 써봐라. 그게 쉽게 되는지.
난 여유롭지 한가하진 않다. 빨래도 하고 글도 쓰고 뭔가 할게 많아 바쁘다. 고독을 더 느껴야 되는데 틈이 없다. 더 내려놔야 되나? 글도 쓰지 않고 명상의 시간을 더 가져야 하나? 뭐 글 쓰기 싫어서 고독 핑계를 대는 건 절대 아니다.
오늘 아침 6:32 출발. 우리 회사가 모태펀드 정시에 선정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가볍게 시작했다. 그것도 우리 회사가 아니라 정재우가 먼저 알려줘 기분이 살짝 그랬지만 그래도 세 번째 도전만에 되어서 천만다행이다.
새벽 이른 시각 출발은 좀 더 고독과 가까워지는 것 같아 좋으나 길을 찾기가 영 만만치 않아 힘들기도 하다. 손전등을 비춰도 화살표가 잘 안 보일 때가 많다. 그러다 발견하는 화살표나 가리비는 생명의 샘물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갈림길에선 언제나 절묘한 위치에 노란색 화살표가 보인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어제와 비슷한 벌판 위 끝없이 펼쳐진 길을 걷다. 새벽의 한기는 손을 얼게 할 정도로 강렬하다. 장갑을 끼었음에도 불구 손이 꽁꽁 언다. 콧물도 흐르고. 기온은 8도라 나오는데 바람까지 부니 체감 기온은 영하 수준이다. 한참을 어둠 속에서 직진하다 오른쪽 방향 화살표를 만났다. 안도와 여유 그리고 뒤돌아봄. 은은히 퍼지는 파스텔 톤의 먼동,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8시 무렵 첫 빠에서 커피 한잔을 하다. 이내 일어나 다시 걷는다. 새벽길 무섭다고 해서 함께 걸은 친구에게서 건네받은 오레오 과자. 입안에 퍼지는 강렬한 단맛의 기운. 아 좋다. 원래 오레오가 이렇게 달고 맛있었던가?
어제 오늘 그늘 없는 벌판을 걷는다. 별빛 달빛 흙빛 다 아름답다. 어제 홀로 걷다 로스 아르코스 목적지로 가는 표지판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표지판을 찍으려 하는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는 게 아닌가? ‘Nature is free, Love is Free’
자연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 준다. 숨 쉴 수 있는 공기도, 마실 수 있는 물도,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도, 강렬한 태양도, 아름다운 별빛과 달빛도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내어준다.
사랑도 쓰는데 돈이 드는 게 아니다. 그저 자연처럼 내어주면 되는데 왜 자꾸 내 안에 움켜쥐고 있으려 하는지. 나눠 주면 줄수록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가득 찰 텐데 왜 아끼려만 드는지.
짧은 문구였지만 순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이 우리에게 자연과 사랑 이 두 가지를 선물로 주셨는데 우린 최소한 사랑 만이라도 베풀고 살아야 한다. 그게 신의 명령이고 우리의 의무이다.
며칠 전 만난 스페인 세비야에서 온 알폰소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We all believe God in a different way.
맞는 말이다. 믿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각기 자신만의 신은 있는 듯하다.
10:10분 사과 하나를 꺼낸다. 달다. 눈 앞에 펼쳐진 포도밭 올리브 밭, 그리고 내 인생의 자갈밭.
작은 도시 Viana를 지난다. 며칠 전부터 가리비 표지판 아래 ‘Wild Sheep’이란 문구가 낙서처럼 많이 써져있다. 왜 이런 문구가 많지? 진짜 야생 양이 많아서 조심하라고 하는 건지 아님 우리는 아직 길들기 전 거친 양이라서 그런 건지.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직선 길, 오르막, 강렬한 10월의 태양, 27도로 치고 올라가는 열기, 신발 안 발가락에 조금 더 차오르는 물집, 진하게 느껴지는 발바닥의 통증, 그 통증을 이겨내려 더 빨리 숨을 헐떡 거리며 내달린다. 쉬지 않고 계속. 8:20분 커피 한잔 이후 별 쉬는 거 없이 내리 5시간을 내달려 오후 1:20분 로그르뇨 숙소 ‘Parroquia de Santiago el Real’에 도착했다. 기부로 운영되는 알베르게다. 아뿔싸, 오후 2시부터 문을 연단다.
근처에 식당을 찾다 ‘Vento’ 라는 빠에 들어갔다. 순례자 메뉴가 15유로로 다른 도시에 비해 비쌌지만 스타터로 나오는 샐러드, 메인인 데리야끼 소스 돼지고기, 디저트 레몬 요구르트 아이스크림까지 지금까지 먹은 음식 중 최고였다.
식사 중 며칠 전 본 스코틀랜드 친구를 만났다. 어제 거리가 넘 짧았다고 다음 도시 가서 잔다던 친구인데 오늘 코스가 좀 길다 보니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다. 왜 이리 반갑지? ㅎㅎ
오늘 42,742걸음으로 30.88킬로를 오다.
2017.10.10. 오후 6:16 로그르뇨 숙소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