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도 못한 이유
기
우리가 트렌디하지 못한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우리가 트렌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죠.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승
스스로 트렌디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논외로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관점은 대개 아래와 같습니다. 1)자신은 트렌드에 큰 관심이 없고, 2)무관심한 만큼 트렌드에 별 영향을 받지 않으며, 3)앞으로도 트렌드 없이 잘 살 것이라는 입장이죠. 저도 그랬습니다.
전
그런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적어도 오늘날엔 그런 선택권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바지를 산다고 쳐요. 트렌드에 큰 관심이 없는 마당에 아카이브를 뒤져가며 빈티지를 구할 것도, 국내에 유통되지 않는 브랜드를 찾아 해외직구를 할 것도 아니죠. 대중적인 SPA·도메스틱 브랜드를 선택하거나, 소비력에 따라 컨템포러리 또는 하이엔드를 구입하겠죠. 그 브랜드가 어느 트렌드를 / 얼마나 빠르고 늦게 차용했느냐에 따라 바지 핏은 제각각이겠지만, 아마 공통적으로 굉장히 '트렌디'할 거에요.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지인의 손에 이끌려 50년 된 노포에 쭈그려서 밥을 먹고 있거나, 파인다이닝을 전전하며 엥겔 지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욜로도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면 호캉스에 와있고, 골프장에서 스윙을 하거나 캠핑장에서 불멍을 하고 있죠. 취미는 또 어떤가요. 갑자기 모든 지인의 인스타에 전시, 공예, 필라테스, LP사진이 보입니다. 미래를 결정하는 재테크마저 그래요. 주식, 코인, 미술품, NFT.. 무엇을 선택하든 트렌드의 손바닥에서 벗어나긴 어렵습니다.
결
이걸 깨닫고 몹시도 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 돈 쓰고 사는 내 인생인데, 저에게 선택권이 없었다는 게요. 정확히 말하면 주도권(지갑)을 순순히 내어줬던 거죠. 트렌드 따위 모르거나 대충 알아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인데 말이죠. 가치소비를 해도 왜 가치있는지 알고 소비해야 가치가 있지, 모르면 그냥 플렉싱이잖아요. 똑같이 주식을 해도 평범한 개미가 기관을 절대 이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먹는다는 책은 20년 전에 나왔는데, 깨닫는 데에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그 뒤로, 제 취향(이라고 불렀던 것들)과 감각(이라 착각했던 것들)을 모두 비웠습니다. 어설프게 스스로 트렌디하다고 여기는 순간 먹잇감(타겟)이 되는 시대이니까요. 먹는 것이든 입는 것이든 유행하는 라이프스타일이든, 우선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딱 한 걸음 떨어져서 관찰·기록하고, 평균적인 시선에서 딱 반 보만 앞서는 것을 목표로 삼고요.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보일 테고, 살아가면서/일을 하면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일단은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아요. 모두가 트렌디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저는 트렌디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덧) 지도 아카이빙의 장점
1. 어느 동네를 가도 시간이 맞으면 한두 곳 둘러볼 수 있습니다. 지독한 길치라 지도를 끼고 살거든요.
2. 지역별 상권이나 아이템, 타겟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비슷한 건 늘 모이게 돼있으니까요.
3. 트랙킹이 가능합니다. 방문했던 곳들의 폐업/성업 여부를 쉽게 알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안목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기_승전결
개인적인 기록도 타인에게 흥미로울 수 있기를 바라며, 기승전결이 있는 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