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말하않.
기
학교에서는 그랬습니다. 글을 길게 쓸수록 좋아했죠. 방학숙제로 밀린 일기를 쓸 때도, 대학에서 레포트를 낼 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눈 밝은 교수님은 10페이지 과제를 내면서 '폰트 10pt, 행간 1.15, 표지 없음'처럼 칼같은 주문으로 날로 영악해져가는 제자들을 절망에 빠트렸죠. 하나라도 더 배워서, 한 글자라도 더 써보라는 깊은 뜻이 있었을 거에요. 게으른 녀석들 같으니라고.
승
20년 간 '질보다 양' 외길로 승부를 보다가 사회에 나왔는데(덕분에 학점은 이득을 봤습니다만), 반대의 상황을 만났습니다. 높은 분들이 읽을 보고서일수록 긴 문장은 죄악시되었죠. "새로운 고객을 모으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 '신규 모객전략 수립'. "일정상 11월 21일까지는 제작이 완료되어야 합니다." ⇒ '11/21 납기必'. 압축된 문장으로 커뮤니케이션에 드는 공수는 줄었는데, 어느 순간 앵무새가 된 기분이었죠. 아무리 복잡한 프로젝트도 늘 쓰던 단어 조합 몇 개로 요약이 되는 신기한 회사언어!
전
그것까진 괜찮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결과물도 비슷해지더군요. 카피라이팅은 말할 것도 없고요. 사람들은 점점 글자를 안 읽고, 마케터는 최대한 짧은 문장으로 임팩트를 줘야 하니까. 개별 단어는 점점 거창해지는데, 내용은 점점 빈약해지는 느낌. 어느 순간 그런 글쓰기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전에는 생각이 닿는 모든 관점을 글로 적어보고 어떻게 줄일지 고민했는데, 이제는 단어 몇 개를 쥐어짜낸 뒤 평이한 문장으로 풀어내는 게 익숙해졌어요. 그 쪽이 더 편하거든요. 그런데 글쓰기는 왜 점점 어렵게 느껴질까요.
결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 사용하는 언어의 폭이 곧 그 사람의 사고의 폭이라는 것이죠(사피어-워프 가설). 학계에서는 여전히 찬반이 나뉘는 가설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해당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정제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마케터의 숙명이지만, 그 안에 자신을 가두는 것은 멍청해질 결심이 아닐까요. 개인적인 글은, 더 짧은 시간에 더 거칠게 써보고자 합니다. 질을 낮추더라도 말이죠. 앞으로 글쓸 때 만큼은 공과 사를 구분하겠습니다!
일기_승전결
개인적인 기록도 타인에게 흥미로울 수 있길 바라며, 기승전결이 있는 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