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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필름 Nov 05. 2021

D-8 | 칸 영화제에 간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가


인생의 정점과 바닥을 바삐 오가지만, 돌아보면 한 자리에 가만히 있었던 것 같은 여행기


<여행해도 불행하던데요>는

2년 전 프랑스에서 한달살기를 했을 때 쓴 일기와

2년 후 한국에서 그 일기를 보며 다시 하루를 기록한 내용을

하루씩 교차해서 보여주는 에세이입니다.

11월 9일 화요일에 출간됩니다!

그때까지 맛보기로 이곳에 매일 하루에 하나씩 본문을 공개할게요!

(스포가 안 될 정도로 아주 쪼끔만)


그럼 바로 여덟 번째 하이라이트 공개합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너무 다리가 아파, 몇 분이나 지났지, 하고 시계를 보면 딱 5분이 지나 있다. 절망을 느끼고 다시 기다리다 시계를 보면 또 고작 5분이다. 한 시간을 버티고 여기에 15분을 더 버티니 5시 15분. 그때서야 관객들을 레드카펫 가까이로 입장 시켜줬다. 짐 검색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레드카펫 바로 옆까지 쭉 들어갔다. 뭐가 좀 보일까 싶었지만 스타들을 찍기 위해 기자들이 올라서는 높이 세워져 있는 단상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극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의 옆이 뻥 뚫려 있어서 혹시라도 계단에 올라 뒤로 돌아봐줄 배우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최대한 가깝게 자리를 잡았다. 키가 너무 작아 슬펐다. 발은 이미 활활 불타고 있었다.


6시가 되자 스타들이 입장한다. 베네치오 델 토로도 보고, 줄리안 무어도 보고, 마틴 스콜세지 감독님도 보고, 크리스틴 스튜어트도 보고, 케이트 블란쳇도 보고, 레아 세이두도 보고, 하비에르 바르뎀도 보고, 페넬로페 크루즈도 봤다. 보긴 봤는데 봤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멀었다. 저 멀리, 조그만 피규어처럼 봤다. 7시 15분쯤 되니 모든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가 끝났다. 건물 안에서 개막식이 열리고 밖에 있는 전광판에서 생중계를 해줬다. 나는 더는 손쓸 수 없는 발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스프라이트 하나를 산 후 화단에 걸터앉았다.



왜 왔을까


나는 칸에 왜 왔을까. 할리우드 스타를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인데,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제시 아이젠버그를 봤다면 또 모르겠지만. 세 시간 반 동안 주구장창 서서 기다리며 얻어낸 그 순간들이 나는 즐겁지 않았다. 발이 아파서 그랬을까. 도대체 구두는 왜 신고 갔을까. 160cm가 167cm가 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걸까.


일단 집으로 돌아가 근처 좋은 식당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지친 마음을 달래보기로 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8시. 사람들이 어설프게 모여 있다. 8시 30분에 버스 한 대가 오니 그제야 줄 서 있는 사람들의 윤곽이 정확해진다. 버스 기사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버스 문을 닫아놓고 역 안으로 들어간다. 승객들은 아픈 발로 서서 더 기다렸다. 총을 든 군인들이 역 주변을 돌아다녔다.


기사가 돌아오고 한 명씩 버스에 탔다. 나는 타지 못 했다. 손님을 꽉 채운 버스는 출발하고, 잠시 후 다음 버스가 오고 또 기사님은 내려서 휴식을 취하고, 9시가 되어서야 버스에 탔다. 집에 돌아오니 10시다. 레스토랑은 9시 반에 닫았다. 나는 집에서 즉석식품을 전자렌지에 돌려 먹었다.



왜 칸에 갔을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제니까, 영화과에 입학한 애들 모두 “칸 가야지” 라는 말을 하거나, 했거나, 들어봤으니까. 그런데 정말, 왜 왔는지 모르겠다. 칸 영화제의 사이즈를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나는 칸 영화제에 갈 만한 영화를 만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칸에 갔다는 단편 영화들을 보면 어쩐지 나도 좀 더 열심히 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직접 칸에 와서 보니 아니었다. 나는 턱도 없다.


하루 종일 구두를 신고 서 있었다. 그냥 편하게 운동화를 신고 갔으면 됐을 일인데, 나는 구두를 신고 칸에 가고 싶었다. 아침부터 그랬고 지금도 같은 마음인데, 나는 이제 칸에 가고 싶지 않다. 온몸이 쑤신다. 내일은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이 쓰는

하루하루 교차 에세이

<여행해도 불행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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