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필름 Nov 05. 2021

D-6 | 새벽에 남의 집 고양이와 벌인 사투


남들 다 '다가가는' 여행기를 쓸 때 혼자만 '도망가는' 여행기를 썼다


<여행해도 불행하던데요>는

2년 전 프랑스에서 한달살기를 했을 때 쓴 일기와

2년 후 한국에서 그 일기를 보며 다시 하루를 기록한 내용을

하루씩 교차해서 보여주는 에세이입니다.

11월 9일 화요일에 출간됩니다!

그때까지 맛보기로 이곳에 매일 하루에 하나씩 본문을 공개할게요!

(스포가 안 될 정도로 아주 쪼끔만)


그럼 바로 열 번째 하이라이트 공개합니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그것도 아주 오래. 외국인들이 자막을 통해 본 〈공작〉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밖으로 나와 얼떨떨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초이! 초이! 돌아보니 R이다. 이 끈질긴 남자. 내가 헤어질 때 분명 심야버스 타고 간다고 했는데 R이 자기 차 있다고 원한다면 태워다줄 수도 있다, 자기도 앙트레에 산다고 했다. 나는 그건 너무 미안하다, 괜찮다고 분명 말했다. 혹시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타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다시 물어보거나 할게, 라고 하고 넘겼는데 이렇게 나오는 출구에 서 있었다니. 걸리고 싶지 않았는데 딱 걸렸다. 나는 영화관에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좀 찍으며 서 있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후, 이제 나도 가야 할 것 같아서 슬슬 걸어가고 있는데 순간 저쪽에서 와! 소리가 들렸다. 〈공작〉의 배우들과 윤종빈 감독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몇 명의 관광객들이 배우들에게 달려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동영상을 찍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후 집에 가야 할 시간. 나는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R에게 그래 알았으니 태워다주세요, 라고 항복을 했다. 그래, 사람의 친절함을 그냥 받자, 불편해하지 말자. R이 설마 뭐 나한테 감정이 있어서 이러겠어? 그냥 친절하게 한국에도 매년 가고 하니까 한국 사람을 칸 영화제에서 만나니 반가워서 친구하려고 그러지.


R의 차까지 걸어가는 동안 여러 파티장들을 지나고 저 멀리 유람선들도 보였는데 R이 자기 친구가 보트 드라이버라면서 내일 그 친구 만나러 갈 건데 이프 유 원트, 내가 원하면 또 같이 가도 된다고 했다. 나도 언어만 빵빵 터지면 속 시원히 따라다니며 이것도 구경하고 저것도 구경하고 싶다. 그럼 내 다큐멘터리의 영상도 훨씬 풍부해지겠지.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손으로 뭔가를 만들며 조용히 있고 싶다.


R의 차를 타고 집까지 오고, 오흐브아!(안녕!) 땡큐 쏘 머치를 하며 R과 또 악수를 했다. 영화 보러 가기 전이랑 집에 들어갈 때랑 등등 해서, 헤어지기 위해 악수를 세 번쯤 한 것 같다. 결국 헤어져서 집에 들어오긴 했다. 하루가 어떻게 갔나 싶다. 영화 끝나고 나온 게 새벽 1시 40분 정도 됐으니 분명 집에 2시 반쯤 도착했

을 텐데, 못해도 3시엔 도착했을 텐데 지금 4시 40분이 넘었다.


옷을 갈아입고 촬영 영상 데이터 백업을 하기 위해 부엌으로 갔는데 부엌 한쪽 소파에 흰색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사자처럼 생겨서 처음 본 순간부터 너무 무섭다고 생각한 고양이였는데 왜 하필 여기에!!!


추워서 들어왔나 딱한 마음이 들려고 했는데 고양이가 막 다가온다. 싱크대로 올라가더니 후라이팬을 핥아 먹는다. 아 진짜…. 나는 어쩔 수 없이 냉장고에서 나머지 햄 하나를 꺼내 내어준다. 착한 마음에 이걸 너한테 주는 게 아니다. 난 네가 무섭게 때문에 이 귀한 햄을 너에게 바치는 것이다. 고양이가 햄을 먹는 동안 나는 식탁에 있는 노트북을 내 방으로 옮기고 부엌문을 닫는다. 창문으로 들어왔으면 창문으로 나가겠지. 잠시 후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려 어쩔 수 없이 나는 부엌문을 연다. 햄을 얼추 다 먹은 것 같다. 고양이는 그래도 가지 않는다. 나는 큰 그릇에 물을 담아 내어준다. 그래도 고양이는 가지 않고 울어댄다. 먹을 걸 더 달라는 건가. 자꾸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소름이 돋아 도망쳤다.


니가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건 알겠는데 나는 니가 무서워서 싫어.


물론 고양이한테 하는 말.



글을 쓰는 동안, 고양이가 1층으로 내려간 것 같다. 아래층에서 우당탕 우당탕,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난다. 이제 앞으로 밖에 나갈 때는 창문이건 그냥 문이건 모두 꼭꼭 걸어잠그고 다닐 거다. 오늘 하루 정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 고양이와의 눈물 겨운 사투의 현장을 영상으로 확인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7A8jpjcXz_o&t=4s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이 쓰는

하루하루 교차 에세이

<여행해도 불행하던데요>

매거진의 이전글 D-7 |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쌍함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