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머리 검은 짐승

by 은예진

강우혁 손에 이끌려 엄청나게 비싼 한우 갈빗집으로 갔다. 동생 밥을 해줘야 한다고 했었지만 생각해 보니 오늘은 야간 레슨이 있는 날이었다. 제인이 야간 레슨을 받으러 가는 날은 두 사람이 나가서 밥을 사 먹는다.

부담을 덜은 서아는 우혁이 사주는 눈 돌아가게 비싼 소고기를 고분고분하게 받아먹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너는 평생 르 꼬르동 블루는 꿈도 꾸지 못하고 지금처럼 남의 뒤치다꺼리만 하고 살게 될 거야.”


서아는 묵묵하게 고기를 먹었다. 한우 갈빗살은 혀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런 고기는 처음 먹어보는데 왜 이토록 마음이 불편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 부자니까 월급 많이 줄게. 아주 손 놓으면 안 되니까 알라메종은 파트로 다녀. 그렇게 살림하면서 일이 년만 모으면 유학 갈 수 있을 거야. 부족하면 내가 꿔줄게. 절대 그냥 주는 거 아니야.”


“나한테 이렇게까지 할 만큼 우리 아빠한테 신세를 졌으면 왜 진작 우리 가족을 도와주지 않았어요? 강우혁 씨 정도면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잖아요.”


우혁은 부지런히 고기를 구워 서아 앞에 놔주다 말고 굳은 듯 가만히 있었다.


“예전처럼 식당에서 담배 피우던 시절이면 이럴 때 담배 한 대 입에 물고 잠시 쉬어 갈 수 있었을 텐데.”

“담배 피워요?”


“아니 담배 같은 거 안 피워. 피부에도 나쁘고 목에도 나쁜 거 왜 피워. 그냥 하는 소리지.”

“칫.”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는데 말해야 네가 나올 것 같아서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도와줬어. 많은 돈은 아니지만 너 대학 보낼 만큼은 계속 보냈어.”


“정말요?”


서아가 입에 넣던 고기를 떨어트릴 만큼 놀란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그러니까 그 집을 나와야 한다는 거 아니야. 내가 돈만 보내고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았더니 이 꼴이 났잖아. 그래서 더 돈만 주는 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서아는 차마 더는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돈이 없다고 그녀를 대학도 보내지 않고 그녀가 버는 돈을 죄다 빼앗아서 제인의 레슨비로 쓰던 새어머니가 실은 강우혁에게 돈을 받아왔다니.


“정말이에요? 정말 돈 준거 맞아요?”


“내 이름은 밝히지 않고 은 피디님에게 신세 진 사람이라며 민석이가 해마다 돈 보내줬어.”


“그만 가봐야겠어요.”


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고기 아직 많이 남았는데.”


서아는 말없이 가방을 등에 매고 룸을 빠져나갔다. 당황한 우혁이 집게도 내려놓지 못하고 따라나섰다.


“야, 은서아 기다려. 데려다줄게.”


집으로 가는 내내 서아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혁은 자신이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서아의 눈치만 살폈다.


“안녕히 가세요.”


차에서 내린 서아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집 나올 때 전화해라. 민석이 보고 데리러 가라고 할게.”


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새어머니도 제인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아는 어둠 속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새어머니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던 건지? 아빠는 어떻게 그런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던 거지?’


모든 게 혼란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오늘따라 늦는지 밖이 조용하다. 서아는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텅 빈 얼굴로 일어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문밖으로 나가자 어머니의 자동차가 보였다.


자동차 앞으로 다가간 서아는 어둠 속에 어슴푸레 보이는 형체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전에도 몇 번 본 적 있었지만 눈 감고 모른 체했다. 새어머니도 여자니까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연애를 하건 결혼을 하건 그것까지 서아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조수석에는 제인 대신 남자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 긴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서아는 피하지 않고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화들짝 놀라 새어머니를 밀어젖혔다.


몸을 돌린 새어머니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올리며 삿대질을 했다. 차 문을 벌컥 열고 튀어나온 새어머니가 다짜고짜 손찌검을 했다. 찰싹 소리와 함께 서아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갔다.


“너 미친 거 아니야? 어디서 누굴 보고 있어. 이게 진짜 제정신이 아니지?”


서아가 뺨을 움켜쥐고도 눈을 부릅뜬 채 새어머니 윤희를 노려보았다.

윤희는 어이가 없는지 달려들어 서아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흔들었다.


“이게 미쳐도 제대로 미쳐야지. 어디서 누굴 노려봐?”


순간 서아가 손을 들어 윤희를 거칠게 밀어젖혔다. 뒤로 밀려난 윤희의 손에 서아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들려있었다.


“나 대학 보내라고 학비 받으셨다면서요?”

“뭐? 뭐라고?”


당황한 윤희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녀의 손아귀에 들려있던 서아의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흩어져 내렸다.


“아빠한테 도움받았다는 사람한테 돈을 받았다면서요? 그 돈 다 어쩌고 나한테 그런 거예요?”


“너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너 키우는데 그 돈 다 썼지 안 썼는지 알아? 그리고 너한테만 쓰라고 준 돈 아니거든. 우리 제인도 네 아빠 딸인데 제인이는 안 쓰니?”


“그럼 최소한 내가 버는 돈은 빼앗지 말았어야지요.”


“아이고, 제 아빠 죽고 오갈 데 없는 년을 내가 먹이고 재우며 이날까지 키웠더니 나한테 돈 조금 준 게 아깝다 이거지. 아까워서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이거지?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윤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무슨 일인가 싶은지 이웃들이 고개를 내밀며 내다보기 시작했다. 남자는 슬그머니 차에서 내려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윤희는 남들이 들으라는 듯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소리를 반복했다. 서아는 그런 윤희를 빤히 바라보다 집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캐리어를 꺼내 제일 먼저 그녀가 사 모았던 아빠의 책들을 챙겼다. 그것만 챙기면 나머지 물건에는 미련도 없었다. 얼마 되지 않는 단출한 옷가지와 화장품 몇 개가 다였다. 양손에 캐리어를 끌고 거실로 나오자 얼굴이 엉망이 된 윤희가 어깨를 떨며 서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를 위로하며 얼굴을 닦아주던 제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언니?”

“잘 있어 제인아. 아빠가 너를 지켜달라고 당부하셨는데 여기까지밖에 못하게 돼서 미안하다.”


“언니야. 그냥 우리랑 같이 살면 안 되니?”


제인이 달려와 서아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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