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늘 죽을 거거든요

by 은예진


“내가 잘못한 걸까? 난 그냥 돈으로 도와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은 피디님 딸이 저렇게 된 게 어쩐지 내 책임 같다.”


우혁이 술잔을 기울이며 푸념했다. 민석은 입을 다문 채 우혁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은 피디님이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 어떤 인간이 돼 있을지 상상이 안 되는데 그런 분 가족에게 꼴랑 돈 몇 푼 집어 줬다고 내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으니.”


“네가 은서아를 위해 나설 명분이 없는데 뭘 할 수 있었겠어. 너 할 만큼 했어. 까놓고 말해서 은 피디님 성정에 너만큼 은혜 입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냐?”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실은 민석도 모르는 게 있다. 민석은 단순하게 스물다섯 살의 우혁이 은장환 피디 눈에 뜨여 주연급으로 올라섰다는 거 정도만 알고 있다. 그래서 우혁이 매년 은 피디 가족 앞으로 돈을 보내고 있는 게 유난이라고 여겼다.


이십 대 초반의 우혁은 당시 소속사의 강요에 의해 호스트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재벌가 딸들이나 돈 좀 만진다는 여자들이 부르는 술자리에 불려 가 술을 따르고 온갖 시중을 들었다. 거절하면 사장의 주먹질이 이어졌다. 상품에 흠집 가면 안 되니까 보이지 않는 곳을 때렸다.


그만두고 싶어서 몇 번이나 계약 해지를 요청했지만 사장은 건달들을 동원해 협박했다. 까불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리겠다고 하거나 여자들 술시중 드는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그 동영상이 풀리면 우혁의 연예계 생활이 위태로워질 만한 장면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날도 밤새 재벌가 여자들의 생일 파티에서 술시중을 들고 나오는 길이었다. 술이 깨지 않아 멍한 상태로 오토바이를 바라보았다.


비가 주적주적 내리던 그날은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로 죽기 알맞은 날이었다. 스물다섯은 오토바이 사고로 죽기에도 아주 좋은 나이 같아 보였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거는 우혁에게 은 피디의 전화가 왔다. 신작에 캐스팅 논의 중인데 한번 봤으면 좋겠다는 연락이었다. 어떻게 소속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전화를 한 건지 모르지만 엉겁결에 은장환 피디를 만났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은 피디는 우혁이 그 끔찍한 소속사를 벗어날 수 있게 도와해 주었다. 앞으로 계속 이 바닥에서 일하고 싶으면 우혁이를 내보내라는 은 피디의 압력에 소속사 사장이 굴복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어림없다는 듯 버텼지만 연예 기자들을 동원해서 제대로 한 번 털어주겠다고 나서자 결국 우혁을 풀어 주었다.


우혁은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소속사 사장이었던 우명진에게 발길질을 당한다. 우명진의 소속사를 나와 새롭게 계약한 회사에서 민석이 매니저 일을 시작했던 터라 민석도 우혁이 당시에 겪은 일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다.


그날 죽어버리려고 마음먹었던 우혁은 무서울 게 없었다. 까짓 피디가 뭐 대수냐 싶어 어깃장을 놓았다.


‘저 드라마 못합니다. 오늘 죽을 거거든요.’

‘여보세요?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죽어? 누가 죽어?’

‘제가요. 제가 죽을 거거든요.’


세상 누구보다 바쁘다는 드라마 피디가 우혁을 살리기 위해 달려왔다. 덕분에 오늘의 강우혁이 존재한다.


“서아 내가 데려올 거야.”


우혁이 술잔을 내려놓고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놀란 민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르 꼬르동 블루로 공부하러 갈 수 있게 학비를 지원해 주면 되지 않을까?”


“그것도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야. 그런데 저대로 놔두고 서아한테 돈만 안겨주면 그 여자한테서 벗어날 수 없

을 것 같아.”


“그건 네 영역이 아니잖아. 서아 씨 삶에 네가 그렇게까지 참견할 권리가 있어?”

“권리?”


우혁은 잠시 머뭇거렸다. 은 피디가 그에게 서아를 부탁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민석의 말대로 은서아 삶에 함부로 참견할 권리 같은 건 없다.


“권리 따위는 없지. 하지만 은 피디님이 저런 서아 모습을 보면 가슴 아플 거야. 난 그분한테 갚아야 할 마음에 빚이 있어.”


“마음에 빚이라. 하기야 네가 왜 은 피디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지 말하지 않으니 나는 알 수 없지.”


민석이 서운한 눈빛으로 우혁을 봤지만 우혁은 고개를 비껴서 못 본체했다.


“여하튼 나는 서아를 우리 집에 입주 가사도우미로 데려오려고.”


“입주 가사도우미? 그건 아닌데.”


민석은 어이없다는 듯 입주 가사도우미는 아니라는 말을 반복했다.


“어째서?”


“누가 서아 씨처럼 젊고 예쁜 여자를 가사도우미라고 믿겠어? 나도 안 믿는다. 그리고 너는 너를 믿을 수 있어?”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은 피디님 딸, 그 꼬맹이 서아를 어떻게 하겠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래봤자 열 살이야. 띠동갑도 아니야. 열대여섯 살 차이는 흔한 게 이 바닥인데.”


“하여간 아니야. 그런 걱정 절대 없어. 나는 솜털 겨우 벗은 애송이 같은 여자 취미 없어. 내 취향 아니야. 너 내 스타일 모르냐. 글래머!”


민석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니가 좀 몸매를 따지기는 하지.”

“난 말이야 가슴 사이즈가 씨컵, 엉덩이둘레 삼십육 이하는 여자로 안 보여.”

“그래서 서아 씨가 남자냐?”


“그건 아니지만 하여간 걱정 붙들어 매. 절대 아무 일도 없어. 나는 은 피디님 대신 걔가 꿈을 이루게 도와주고 싶을 뿐이야.”


“일단 그렇다 쳐. 서아 씨가 네 말을 들을까?”


우혁이 양손을 깍지 끼고 턱을 고이며 말했다.


“되게 해야지.”

“어떻게?”

“다 생각이 있어.”


민석은 수상한 표정으로 우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혁은 무언가 대단한 계획이 있는 것처럼 으스댔지만 사실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억지로 끌어낸다고 서아가 그 집에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택은 그녀 몫이었다. 새어머니와 동생을 위해서 끝까지 그렇게 살겠다고 하면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또한 서아가 선택한 삶이니 존중해야 한다.


한 달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솔직하게 말하는 거였다. 네 아버지 은 피디님에게 은혜를 받았으니 그걸 갚고 싶은 거다. 네가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고 말이다. 우혁이 호스트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만 건드리지 않으면 다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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