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부터 출근하는 직장인들 상대로 커피를 파는 세진은 일곱 시까지 출근하는 서아와 같이 일어났다. 서아는 주문받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내리느라 정신없는 세진 몰래 캐리어를 꺼내 밖으로 나섰다.
서아가 캐리어를 끌고 가는 걸 보면 갈 곳도 없는데 어딜 가져가냐며 막아설게 분명했다. 강우혁에게 가건 다른 곳으로 가건 세진에게 신세 지는 건 하룻밤으로 충분했다. 여름이 성큼 다가온 유월이지만 기온차가 심해서 새벽이면 어깨가 으스스하게 떨렸다. 캐리어에서 미처 긴팔 카디건을 꺼내지 못한 서아는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더딘 걸음을 옮겼다.
캐리어를 탈의실 귀퉁이에 세워 둔 채로 멍한 하루를 보냈다. 알라메종은 어제 강우혁의 방문 덕분에 손님이 곱절로 늘어났다. SNS 홍보에 열을 올리는 김 사장은 자신과 강우혁의 사진을 어찌나 신속하게 돌렸는지 오늘은 그 효과가 확실하게 보였다.
계속 몰려드는 손님 때문에 점심도 먹지 못하고 하루 종일 서 있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지자 의식은 자꾸 가라앉는데 몸은 저 혼자서 습관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입술에 퀭한 눈빛의 서아를 보고 못 미더웠는지 제과부 팀장이 뭐라도 좀 먹고 들어가라고 했지만 서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캐리어를 끌고 알라메종을 나서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멍청하게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서아의 캐리어에 걸려 인상을 썼다. 서아는 자신이 길을 막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서 있다 깜짝 놀라 옆으로 물러섰다.
유월의 해는 길어서 여덟 시가 됐어도 어두워지지 않고 사람들은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떠들었다. 계속 그렇게 서 있기만 할 수 없으니 어디든지 가기는 가야 할 것이다. 터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화장품 매장 앞에 강우혁이 서 있었다.
서아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심호흡을 하며 강우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빠르게 요동쳤다. 강우혁은 그녀 앞에서 지어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장품 매장에서 나오던 외국 여자들이 강우혁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사진을 찍는다.
강우혁은 여전히 웃고만 있다. 서아는 그제야 눈앞에 있는 강우혁이 광고용 등신대라는 것을 깨닫고 허탈함에 고개를 수그렸다.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머리가 마비돼서 등신대와 사람을 구분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더는 버티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었다.
택시를 세워 캐리어 두 개를 실었다. 그녀가 낑낑거리자 기사가 내려 도와주었다. 책이 든 캐리어는 너무 무거워서 트렁크에 싣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호기롭게 타운 하우스 입구에서 내렸지만 막상 경비실이 눈앞에 보이자 괜히 온 것만 같은 생각에 주춤거렸다.
캐리어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어두워진 하늘을 보니 어제 세진이 알려준 목성이 반짝였다. 손을 들어 목성에서 한 뼘을 재서 옮겨가자 반짝이는 또 다른 별이 보인다. 저 별처럼 제 스스로 빛나는 별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법이다. 떨어져 있을 때는 아름다운 별이지만 가까이 있으면 재앙이 되기 쉽다.
그런데 나는 어쩌자고 여기와 있는 걸까?
경비원은 아까부터 흘끔거리며 그녀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냥 가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냥 가는 게 맞을 것이다.
엉덩이를 캐리어에서 일으키며 돌아선 순간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야, 은서아! 전화하랬더니 왜 이러고 있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강우혁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서아는 반가운 마음에 울컥했다. 여길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음에도 우혁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자 걷잡을 수 없게 반가웠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인사도 없이 캐리어를 집어 든 우혁이 무게에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이걸 끌고 돌아다닌 거야? 너 애가 생긴 것답지 않게 왜 그렇게 미련하냐?”
서아는 눈물 나게 반가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차를 흘끔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혼자예요? 장 대표님은 없나 보죠?”
“어, 일이 있어서 일찍 들어갔어.”
“그럼 전화했어도 어차피 안 되는 거였잖아요. 장 대표님한테 전화하라고 했잖아요?”
“민석이 안 되면 나라도 갔지.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우혁이 손가락으로 서아의 이마를 튕기며 말했다.
‘당신이 직접 나를 데리러 온다고? 왜? 도대체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우리 아빠가 당신한테 뭘 얼마나 해줬기에?’
서아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그냥 우혁이 시키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서아가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리고 있는 걸 눈여겨보던 경비원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우혁은 그런 경비원의 시선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 사람이 소문내면 어떻게 해요?”
“소문 못내 걱정하지 마.”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여기 타운 하우스에서 일어나는 일 소문냈다가는 바로 잘려. 그건 기본 중에 기본이야.”
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기웃거렸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동네다. 한 채에 백억 가까이 된다는 집들의 모습은 성처럼 보인다. 주차장에 들어가자 서아가 먼저 내려 트렁크를 잡았지만 우혁의 손에 밀려났다.
“성가시게 굴지 말고 비켜라.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여기까지 왔으면서 또 뭘 한다고.”
서아는 트렁크에서 손을 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들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 우혁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은?”
“네?”
“저녁 먹었냐고?”
“어제저녁 같이 먹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너 혹시? 어제저녁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은 거야?”
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겨운 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우혁은 그런 서아를 보더니 화가 치미는 표정을 지었다.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이 무거운 걸 끌고 여기까지 왔다고? 너 진짜…….”
우혁은 더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느라 주먹을 움켜쥐더니 기다리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비스듬히 열린 창으로 시원한 밤바람이 들어왔다. 나무가 많은 동네의 공기는 서울 같지 않게 깨끗한 느낌이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자 커튼을 날리며 들어온 바람이 서아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낯선 동네 낯선 집인데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가죽 냄새나는 소파도 푹신한 러그가 깔린 바닥도 하물며 공기조차 낯선 이곳에서 서아는 몰려오는 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주방에 들어간 우혁은 냉장고와 싱크대를 뒤지며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 거렸다. 하루 종일 굶은 애한테는 어떤 걸 먹여야 하는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자기도 다이어트 중에 16시간씩 굶으며 간헐적 단식을 해봤으면서도 서아가 굶었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
분말 수프에 뜨거운 물을 붓고 오븐에 빵을 데웠다. 빈속이 놀라지 않게 먼저 가볍게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트레이에 수프와 빵을 들고 거실로 나간 우혁은 발걸음을 멈췄다. 서아가 몸을 옆으로 기울인 채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잠든 서아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뭔가 묵직하고 둔탁한 것이 우혁의 갈비뼈를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식도 끝에서 가슴까지가 먹먹하고 답답해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우혁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서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 많이 힘들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