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고 자.”
서아가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우혁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서아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혁을 바라보자 그가 멋쩍은 듯 손을 내렸다.
“그냥 자면 너무 지치니까 밥 먹고 자.”
“밥이라고요?”
“응, 우선 이거 먹고 있어. 내가 식탁에 먹을 거 차려 놓을 게.”
“이런 일은 가사도우미로 온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혁이 피식 웃더니 어서 먹기나 하라고 내밀었다. 서아는 우혁이 주방으로 가는 걸 물끄러미 보다가 고소한 빵 냄새에게 이끌려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수프를 입에 넣자 옥수수 알갱이가 톡톡 터졌다. 빵을 잘라 수프를 찍어 베어 물자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하루 종일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먹을 게 입에 들어가자 그제야 몸이 깨어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위가 먹을 것을 더 달라고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서아는 빵으로 수프 그릇을 싹싹 닦아 모두 먹어치웠다.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가자 식탁에 데운 즉석밥과 조미 김, 달걀 프라이가 차려져 있었다. 우혁은 전기레인지 앞에서 캔에 든 참치와 김치를 볶는 중이었다.
“이거 나 먹으라고 차리는 거예요?”
“그럼 너 먹으라고 하지 누구 먹으라고 이걸 차리겠냐?”
서아는 자석에 끌리듯 식탁에 앉았다. 우혁은 그런 서아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참치김치볶음을 내려놓았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미련 곰탱이 마냥 밥까지 굶고 다녀? 너 앞으로 이런 식으로 나 화나게 하면 그때는 혼날 줄 알아.”
우혁의 표정에서 지금 하는 말이 장난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씩씩거렸다. 서아는 그런 우혁이 이상했지만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밥이 달았다. 입에서 씹히는 맛이 고소하고 달큼했다. 서툴지만 뒤집어서 오버이지(over easy)로 익힌 달걀 프라이에 숟가락을 대자 노른자가 톡 하고 터졌다. 캔 참치가 잔뜩 들어간 김치 볶음은 입에 착착 달라붙게 감칠맛이 있었다.
“김치볶음 맛있네요. 이 정도 솜씨면 가사도우미 필요 없겠는데요.”
“맨날 참치김치볶음만 먹으면 필요 없지. 내가 유일하게 하는 몇 가지 안 되는 요리 중에 하나거든. 그래서 우리 집에 다른 건 몰라도 묵은지하고 참치 캔은 꼭 있어야 해.”
서아가 즉석밥 하나를 다 먹고 숟가락을 놓자 화가 잔뜩 나 있던 우혁의 얼굴도 부드럽게 풀렸다.
“네가 나간다고 하니까 새엄마가 뭐라고 하니?”
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뭐라고 하건 말건 이제 신경 쓸 필요 없는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이다. 알라메종에서는 파트타임 근무로 옮기고 며칠 느긋하게 보내. 그다음에 아줌마한테 업무 인수인계하라고 할게.”
“아니에요. 바로 인수받을게요. 공짜로 놀고먹는 거 싫어요.”
“시키는 대로 해라.”
우혁이 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아는 그런 우혁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듯 입술을 비죽거렸다.
“맨날 눈에 힘주고 노려보기만 해.”
우혁은 서아의 말에 뜨끔한지 내가 언제 그랬냐고 투덜댔다. 서아는 못 들은 척하며 식탁에 있는 그릇을 집어 들었다.
“뭐 하려고?”
“밥을 먹었으니 설거지를 해야지요.”
“됐다. 하루 종일 굶고 다닌 주제에 무슨 설거지를 한다고.”
“그래도…….”
“됐으니 놔두고 네가 쓸 방이나 보러 가자.”
한 번 더 그릇을 집어 들어볼까 싶었지만 우혁이 재빨리 막아서는 바람에 포기했다.
“이 층은 내가 쓰니까 너는 일 층에 있는 저 끝 방을 쓰자. 민석이가 가끔 여기서 잘 때 쓰던 방인데 우선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침구하고 필요한 가구 좀 사러 가자.”
방 안에는 싱글 침대와 벽에 붙여놓은 책상 용도의 테이블뿐이었다. 짙은 회색 침구와 커튼도 없는 방은 마치 수도승의 거처 같아 보였다.
“가구를 뭐 하러 사요. 그냥 쓰면 되는데.”
“침대도 새로 사고, 커튼도 달고, 화장대도 하나 사야지.”
“괜찮아요. 신세 지는 것만 해도 부담스러운데 무슨 방을 꾸며요.”
“내가 싫어. 내가 이런 방에 너를 재우는 게 싫어.”
밥을 먹고 난 서아는 우혁의 말에 토를 달 기운이 났다.
“이 방 쓰는 사람은 난데 왜 강우혁 씨가 야단이에요?”
“넌 좀 내가 말을 하면 고분고분 들어주면 안 되니? 어떻게 말끝마다 토를 달고 야단이야.”
“고분고분요?”
“그래 좀 고분고분하라고!”
“아아, 그랬구나. 강우혁 씨는 고분고분한 사람을 찾는구나. 아주 고분고분해서 강우혁 씨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모양인데 그럼 사람 잘못 봤어요. 나는 절대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고.”
“내일 당장 나갈 테니 고분고분한 도우미 찾아서 일 시키세요. 저는 고분고분 못하니까.”
“쫌!”
우혁이 답답한지 쫌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외쳤다. 서아가 그런 우혁을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우혁이 중얼거렸다.
“고분고분이 잘못했네.”
우혁의 목소리가 혼이 난 어린애 같았다. 서아는 웃음이 나와 어깨가 들썩이는 걸 참느라 애를 썼다. 그녀가 웃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아직은 출근하던 대로 출근해야 하니까 내일은 아침 6시에 나가야 하거든요. 조용히 출근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
“출근을 그렇게 일찍 해?”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점심시간 빼고 하루 열한 시간씩 근무했어요.”
“많이 힘들었겠다.”
마치 텔레비전 다큐 프로의 내레이션을 듣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정이 제대로 들어간 우혁의 말이 서아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서아는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알라메종에서 열심히 마카롱을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해요.”
“하긴 그러니까 르 꼬르동 블루에 가고 싶었지. 알았으니 잘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