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신경 쓰이는 아이

by 은예진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서아는 희미하게 보이는 벽지 무늬와 붙박이장의 빗살문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여기가 어디더라?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 창문 밖을 내다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일찌감치 해가 뜬 여름날의 마당에는 초록색 잔디가 풍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렇다. 여기는 강우혁의 집이었다. 세상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갈 곳이 없어 무작정 오기는 했는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싶었다. 아빠한테 신세를 졌다는 말만 믿고 알지도 못하는 남자 집으로 찾아오다니.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머뭇거리다 보니 여섯 시가 가까워졌다. 마음이 급해진 서아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대충 세수를 하고 머리를 질끈 묶은 채 나가려는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꽉 움켜잡았다.


“엄마야!”


서아의 외침에 우혁이 더 놀라서 불에 덴 것처럼 손을 뗐다.


“깜짝이야!”

“놀라기는 내가 더 놀랐네요. 왜요? 왜 벌써 일어났어요?”

“너 데려다주려고. 가자.”

“네에에?”


조금 전 우혁이 어깨를 잡아서 놀란 건 댈 것도 아니었다. 우혁이 그녀를 출근시켜주기 위해 이렇게 일찍 나서다니 뭔가 정신이 얼떨떨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너는 매번 뭐가 그렇게 괜찮니? 이 동네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하철역이 멀다. 내가 데려다준다고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네, 알겠습니다.”


서아가 너무 얌전하게 대답하자 우혁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싱긋 웃었다.


“좋네.”

앞장선 우혁이 조수석 문을 열고 턱짓을 했다. 서아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났어야 하는데 너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만 같아 불안했다. 그렇지 않고는 강우혁이 어떻게 자신을 위해 밥을 차리고 출근을 시켜주겠다며 조수석 문을 열고 있을까.


“오늘 출근하면 꼭 근무 시간 바꿔라. 그리고 면허는 있니?”

“있기는 한데 장롱면허예요.”

“그럼 연수가 필요하겠군.”

“왜요?”


“보다시피 우리 주차장에는 놀고 있는 차가 여러 대 있고 너는 여기서 출퇴근을 하려면 차가 필요하니까 내가 없을 때는 저기서 아무거나 끌고 출근하라고.”


“어휴, 무슨 그런 말씀을.”


“왜? 뭐가 어때서?”


“내가 부담스러워서 저렇게 좋은 차를 어떻게 끌고 나서요. 더군다나 저런 차 끌고 다니는 걸 알라메종에서 알기라도 하면 뭐라고 말해요?”


“별 걱정 다하네. 차야 문제 생기면 고치면 되는 거고 근처 유료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가면 알라메종에서 알 턱이 없지. 너도 참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다.”


차가 한남대교를 건너자 바로 가로수 길에 있는 알라메종에 도착했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다리만 건너면 바로 집이네요. 이렇게 가까운 걸 어제는 왜 몰랐지? 하긴 정신이 없기는 했지.”


우혁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서아가 그렇게 짐을 싸 들고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지 알기에 어제가 어떤 하루였을지 짐작이 되었다.


“퇴근 일곱 시에 한다고 했지. 데리러 올 테니 기다려라.”

“부담스럽게 왜 자꾸 이러세요.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자꾸 싫다고 하면 차를 알라메종 바로 앞에 대고 내가 내려서 조수석 문 열어 준다.”

“헉.”


서아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알았어요. 데리러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요.”

“진작 그럴 것이지.”


의기양양한 우혁의 얼굴을 보자 서아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우혁이 차를 돌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민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이 시간에 어딜 가서 집이 비어 있는 거야?


“은솜이 어제 가방 싸서 들어왔다.”

-진짜?


놀란 민석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진짜지. 지금 알라메종에 출근시켜주고 가는 중이야.”


-네가 서아 씨 출근까지 시켜줬다고?


“여기 교통이 나빠서 지하철역이 너무 멀잖아.”


민석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너 서아 씨 삶에 그렇게 과하게 들어가는 거 오버야. 나는 아무래도 걱정된다.


“내가 보기에는 걱정하는 네가 오버 같다.”


전화를 끊은 우혁은 좀 전보다 많아진 차들로 가득 찬 전방의 도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꾸 경고음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밤 서아를 방에 들여보내놓고 쉽게 잠들지 못해 서성였다.


자신의 발아래 그 아이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자 뭔가 마음이 들떠 자리에 눕지 못했다. 취향도 아닐뿐더러 호감 가는 구석도 없고 더군다나 자기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아이였다. 이제 겨우 성인이 된 계집아이 같은 서아는 은 피디의 딸일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지? 도대체 뭐지? 밤새 침대에서 뒤척이다 결국 잠들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석에게는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서아 일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아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어쩐지 죄를 짓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 나 왜 이러는 거니. 강우혁 정신 차려, 정신!”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잔뜩 주고 고함쳤다. 한 번으로 안 될 것 같아서 여러 번 외쳤다. 발성 연습을 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발음을 정확히 해서 외쳤다. 정신을 차리라고 외치는 그 순간에도 서아의 모습이 언 듯 스쳐 지나갔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은 피디님 때문에 마음이 쓰여서 연민을 다른 감정으로 착각하는 게 틀림없다. 조금 지나면 적응되고 그러다 보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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