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말이 안 돼? 너한테는 말이 안 되는지 몰라도 나한테는 말이 돼서 하는 일이니까 신경 끊어.”
그때 주방에서 민석도 복숭아를 먹으며 나왔다. 채영을 본 민석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채영은 현관으로 들어오지 않고 열린 거실 유리창으로 들어오며 민석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민석 오빠, 지금 제정신이야? 여자애를 집에 들였다가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누가 봐도 저런 여
자를 집에 들여놓고 둘이 살면서 도우미라고 하는 거 말이 안 되잖아.”
“윤채영, 너 자꾸 저런 여자라고 하는데 저런 여자가 어떤 여자야?”
우혁이 채영을 노려보며 물었다.
“저런 여자가 어떤 여자냐고?”
우혁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채영이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빠……. 나는 그냥 오빠가 걱정돼서…….”
보다 못한 민석이 채영의 팔을 잡고 현관으로 나갔다. 서아는 재빨리 채영이 유리창 밖에 벗어 놓은 신발을 들고 따라가 현관에 놓아주었다. 채영은 고개를 휙 돌려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으로 서아를 쏘아보았다.
민석이 채영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가자 우혁은 쾅 소리가 나게 거실 유리창을 닫아 버렸다.
“너는 속도 없냐? 신발을 뭐 하러 가져다줘?”
“왜 아침부터 채영 씨를 울리고 야단이에요.”
서아가 마치 채영의 언니라도 되는 듯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파에 털썩 앉은 우혁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너는 아직도 멀었다.”
“뭐가요?”
“여배우는 연기로 먹고사는 애들이야. 쟤들은 가끔 현실과 연기를 구분 못하고 과몰입을 잘해. 저거 연기야. 그런데 자기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때가 많아.”
“정말요?”
서아가 놀란 듯 감탄사를 연발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채영을 찾았다. 채영이 마당에 설치해 놓은 파고라 안에서 민석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좀 전에 울먹거리던 채영은 어디로 간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채영 씨가 대표님이랑 아주 재미있나 봐요.”
“그렇다니까.”
서아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우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남자 배우는 어때요?”
“응?”
“여배우만 과몰입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남자 배우도 일상을 연기하고 자기가 연기하고 있는 걸 모를 때도 있어요?”
우혁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업계 비밀을 너무 많이 가르쳐줬네.”
“새로운 세상을 접하다 보니까 신기하고 궁금한 게 좀 많네요.”
“커피나 마셔야겠다.”
우혁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주방으로 향했다. 서아가 주춤거리고 따라오자 우혁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커피 하나는 좀 잘 내리는데. 너도 마실래? 알다시피 지난번 드라마 주인공 하느라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 놨는데 꽤 쓸모 있네.”
“내려 주신다면 영광이지요.”
우혁은 싱크대를 열어 커피 그라인더를 꺼냈다. 달걀을 가로로 자른 것 같은 손잡이가 달린 원통형 그라인더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라인더 안에 원두를 넣은 우혁이 손잡이를 돌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새집을 지은 부스스한 머리에 목이 헐렁하게 늘어난 면 티셔츠와 파자마를 입은 우혁이 편안한 표정으로 커피를 갈고 있었다.
“너 혹시 대도둑 호첸플로츠라는 동화 아니?”
“헉, 그거 우리 아빠가 엄청 좋아해서 어릴 적에 많이 읽은 동화책인데.”
“아, 은 피디님이 좋아하셨다고? 그렇구나.”
우혁이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그 책에서 할머니가 음악이 나오는 커피 가는 기계를 호첸플로츠한테 빼앗기잖아. 어려서 촌놈인 나는 음악이 나오는 커피 가는 기계가 도대체 뭔지 이해하지 못했어.”
“크큭. 진짜? 우리 집에는 커피 그라인더 있었는데.”
“역시 세대 차이가 나는군.”
드리퍼에 여과지를 끼우고 린스를 한 뒤 그라인더에 들어 있는 커피를 털어 넣은 우혁이 잠시 눈을 감고 커피 향을 맡았다. 서아는 그런 우혁을 바라보며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상황에 몰입을 잘하고 아이같이 순수하면서도 아주 예민한 기질이 보였다.
눈을 뜬 우혁이 조심스럽게 드립포트를 들고 물을 따른다. 졸졸 거리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방 멈췄다. 커피가 적은 양의 물을 먹고 거품을 내며 부풀어 올랐다. 일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 흐르고 다시 물을 붓기 시작했다.
커피 향이 주방 안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서아는 물 떨어지는 소리와 커피 향이 좋아 아일랜드 식탁에 턱을 고이고 앉아 드리퍼 아래로 떨어지는 커피를 바라보았다. 아빠 책을 되찾기 위해 만난 강우혁과 이렇게 인연이 되었다는 게 신기하고 아직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얌전하게 생긴 흰색 찻잔을 꺼내 커피를 따르며 우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가면 놀이를 해. 여러 개의 가면을 가지고 상황에 따라 바꿔 쓰지. 그런데 어느 순간 가면 안의 진짜 내 얼굴을 잊어버린 것 같아.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서아가 손을 내밀어 커피를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머금자 연한 단맛이 나는 부드러운 커피였다.
“강우혁 씨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다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요.”
“맛은?”
“당연히 근사하지요.”
우혁이 지그시 웃으며 찻잔에 입을 댔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저는 진정한 내가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가면과 가면이 모여서 나를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걸까?”
서아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채영을 보내고 집으로 들어온 민석이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우혁도 서아도 민석이 그렇게 한참 동안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